[르포]전재산 2조원 독립운동에 바친 이회영 선생…"난잎으로 칼을 얻다"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
2조원 처분 후 일가가 망명
만주에 신흥무관학교 세워
광복군·대한민국 국군 뿌리
"이회영은 요시찰이었다. 그에게는 늘 망원(감시자, 끄나풀, 밀정)이 붙어 있었다. 이회영은 그림자였다. 그는 보이되 보이지 않아야 했다. 이회영은 동지들과 나누는 중요한 대화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끔 필담으로 써가면서 진행하곤 했다. 대화가 끝나면 곧바로 종이를 불태웠다."
광복절을 맞이해 일제강점기 수많은 지식인과 상류층이 친일파로 변절해가는 동안에도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가진 것을 오롯이 내놓은 삶을 살다간 이들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주목받는 인물로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 가문이 있다. 흔히 '우당 6형제'라 불리는 이회영 선생과 그 가문은 독립운동 명문가로 이름이 높다.
서울 종로구 독립문역에서 작은 마을버스를 타고 굽이치는 길을 올라가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양옥이 보인다. 미국 선교사들이 거주한 ‘캠벨 하우스’에 마련된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1867~1932)의 기념관이다. 최근 서울 중구 예장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 마당에 들어서면 기념관 입구에는 우당의 흉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 곳곳에 남겨진 서적들과 안내문, 전시물들을 읽고 보다 보면 독립운동의 애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회영 선생은 조선 시대 선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10대손으로 구한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현재의 서울 명동 일대가 모두 이회영 선생 일가의 땅일 정도로 조선 최고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런 그가 독립운동의 뜻을 품게 된 건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면서다.
이회영 선생 일가는 당시 40만원 정도(1969년 물가 기준으로 약 600억원·현재 가치로 약 2조원)에 달하는 재산을 모두 비밀리에 처분해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6형제와 전 가족 60여명은 만주에서 처분한 전 재산을 온전히 최초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사용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의열단,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통한다. 1911년 세워진 이후 약 10년간 3500명의 독립군 장교와 병사들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다수가 유명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고 광복군의 중심인물로 성장한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사용된 소총과 총검, 권총 등은 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기념관의 설명을 들어보면 1923년 이회영의 큰아들 규학과 둘째 형 이석영의 아들 규준 등 청년들은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비밀행동 결사 '다물단'을 구성했다. 다물단은 친일파와 밀정 처단을 목표로 한 조직이다. 기념관 관계자는 “밀정은 독립군 부대를 통째로 무너뜨리는 것만큼 위험하고 일제 고등계 형사들보다 악랄한 배신자들로, 당시 다물단은 이를 박멸코자 한 것”이라며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쳤다는 '다물단이 온다'는 말은 다물단의 치열한 활약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한때 조선에서 당대 최고의 부호로 통했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 선생 일가는 정작 베이징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견디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당시 이회영 선생은 묵란(墨蘭)을 그려 독립 자금을 마련하곤 했는데, 이때 그린 묵란 그림 몇점이 "난잎이 칼을 품지 않으면 한낱 풀잎에 지나지 않고, 칼이 난 잎을 품지 못하면 또한 사나운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와 함께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안타깝게도 1932년 일본군에게 잡힌 이회영 선생은 모진 고문을 당하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망명 후 35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고 1945년 조국이 해방됐을 때 6형제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성재 이시영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굶어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행방불명 되는 등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나마 이시영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을 때 초대 부통령이 됐지만 1951년 이승만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며 이 자리마저도 자진해서 사퇴했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 중 한 명인 이종찬 현 광복회장은 육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1980년대 여당인 민정당 국회의원과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안기부로 명칭을 바꾼 국가정보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또 다른 손자인 이종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인권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이다.
전 재산을 바치고도 자신의 족적 하나, 이름 하나 어느 곳에 쉽게 남기지 못했던 이회영 선생과 그 형제들. 그만큼 그들의 기록을 찾는 일조차 그 후손들은 힘들게 이어왔다고 기념관 측은 설명했다.
단순히 귀족이나 상류층의 덕목이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넘어 이회영 선생이 보여준 숭고한 뜻과 정신은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진정한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문혜원 기자 hmoon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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