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죽이자" 임정 발칵…김구 측근은 권총 빼들었다

신복룡 2024. 8. 1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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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 타협 없이 대립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은 좌우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하던 해방정국 풍경과 닮았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5)입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인물 중심으로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를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봅니다. 제 2부 '여운형과 김규식'편 제 1화를 무료로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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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의 연재글을 중앙북스에서 단행본으로 엮었습니다. 서점과 인터넷에서도『해방정국의 풍경-인물로 돌아보는 대한민국 현대사』(중앙books)를 만나보시죠.

「 〈제 2부〉 여운형과 김규식의 만남과 헤어짐
① 임정과 밀정, 그리고 여운형…김구 측근은 권총 빼들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4524

② “대물 여운형” 점찍은 美군정, 병약남 김규식에 눈 돌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6200

③ 미국은 양다리를 못 참았다, 중도파 고집한 여운형 최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7586

④ ‘좌우합작’ 허구의 희생자들…중도파, 비극적 해프닝 맞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8952

「 〈제2부〉 여운형과 김규식의 만남과 헤어짐 」

「 ① 천성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기 」


해방정국의 풍운아 여운형

장수한 사람의 일생을 살펴보면, 하루에 만나서 말을 걸어본 사람이 7세 이전에는 5명, 학생 시절 20년 동안에는 20명, 청장년기 40년 동안에는 30명, 은퇴한 뒤 15년 동안의 노년에는 5명 정도 된다. 그러면 한 생애 80년 동안에 60만 명 정도와 말을 나누는데, 대부분은 부모·부부·친구·동료·자식과 중복된다. 국회의원에 출마해 시장통에서 악수한 것을 빼면, 우리가 일생에 인연을 맺는 사람은 5000명 남짓이다.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2005년 독립유공 대통령장,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중앙포토

그들 가운데에는 처음 만나 인상 좋고, 어쩌면 내 편이 될 것만 같고,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흔치 않지만, 가끔은 있다. 인품 좋고, 부티 나고, 말 통하고, 언변 좋고, 사회적 위치도 번듯하고, 인상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그런 인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운형(呂運亨)을 꼽고 싶다. 그는 경기도 양주 대지주의 아들로서 인물 좋고, 언변 좋고, 인상 좋고, 호감 가는 인상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에 빠질 것이 없었다. 정치인으로서의 미덕인 체력도 좋아 각종 운동에 익숙해 훗날 초대 조선체육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인상 좋은 사람을 겪어보고 나면, 그 사람은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비슷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것은 큰 미덕이며 장점이 될 수 있으나 그가 어느 순간에 그 인상 좋던 내 친구인지 아니면 이제는 내 적군의 동지인지 구분이 잘되지 않는 때가 온다. 그는 자신이 그 ‘포커판의 조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때가 바로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그때는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 여운형이 바로 그랬다.


목사가 되려 했던 ‘금수저’ 출신

여운형은 양주 지주의 아들로 부러울 것 없는 금수저 출신이었다. 어머니가 태몽으로 용꿈을 꾸어 호를 몽양(夢陽)이라 지었다지만 태몽이란 엄마가 자식에게 부여하는 회상성 기억 조작(retrospective falsification)일 경우가 많은데 이 점에서는 승룡(承龍)이라 이름을 지은 이승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여운형의 집안은 대대로 노론이었는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선대부터 동학에 호의적이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여운형은 노비 문서를 불태워 모두 면천(免賤)해 주고 땅까지 나눠주었다. 땅을 영혼으로 삼으며, 땅이 곧 신분이던 전근대 사회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비범하고 상찬받을 만한 인물이다.

인간은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어지는 운명적인 존재다. 여기에서 운명이라 함은 불가(佛家)의 표현으로는 인연이며, 달리 말하면 ‘만남’이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만남은 첫째가 부모이고, 둘째는 저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고, 셋째는 청소년기에 학교에서 만난 또래(친구)다. (Sidney Verba, 1969)

이러한 만남은 나의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여운형의 경우에, 부모를 잘 만난 것, 배재학당에 입학한 것, 기독교 선교사 곽안련(Allen Clark)을 만난 것, 당시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숭앙받던 상동교회(尙洞敎會)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만난 것이 모두 그의 일생을 결정지어주는 인연이 되었다.

젊은 날의 여운형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그가 바라던 대로 목사가 되었더라도 부흥선교사로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학의 길을 가지 않고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심적 변화는 망국과 관련이 있다. 그는 교육이 기도보다 조선 독립을 위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南宮檍)의 권고로 강릉 초당의숙(草堂義塾) 교사로 부임해 영어와 역사·지리를 가르쳤다.

여운형(오른쪽 깃발 뒤)은 스포츠를 좋아했다. 1936년 간도 용정에서 축구팀과 함께한 모습. 중앙포토


강릉 초당학교서 교사 생활

초당의숙은 지금의 강릉 경포대 숲속에 있는 작은 마을 초당동에 있던 민족학교였다. 강릉의 지사(志士) 최돈철(崔燉徹)이 세웠는데, 지금은 관광객이 그런 역사적 유서도 모르고 두부만 먹고 나오는 바로 그 마을이다. 초당 두부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바닷물로 간수해 맛이 독특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하게도 초당의숙은 중국의 캉유웨이(康有爲)가 망국의 역사를 슬퍼하며 청년을 깨우치고자 세운 학교와 이름이 같아, 여운형도 그런 점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여운형은 이곳에서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수업하면서 단군 연호를 쓴 것이 화근이 되어 강원도 학무국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본의 아니게 강릉을 떠났다.

여운형은 평양으로 올라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2년을 마쳤으나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다. 심화(心火)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망국에 대한 울분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잠시 서울에 들렀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4년에 가산을 정리하고 현순(玄楯) 목사의 도움을 받아 당시 총독부 외사국장인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소개장을 얻어 신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망명 지사 가운데 선두주자였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남경(南京)의 진린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 입학해 3년간 수업을 받았으나 졸업하지 못했다.


여운형이라는 불가해한 인물

이 무렵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로 미국 윌슨 대통령(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가 풍미하던 때였다. 그러한 여파로 1918년 11월에 지난날 주중 공사이며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상해에 와서 환영회를 개최하자 1000여 명이 모였는데, 여운형도 그 자리에 참석해 세계 대세를 알게 되었다.

여운형이 상해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일본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919년 8월에 일본 척식(拓殖)대신 고가 렌노스케(古賀廉之助)가 그를 도쿄로 초청했다. 여운형은 데이고쿠(帝國)호텔에서 내외 신문 기자와 명사 500명에게 조선 독립의 절대 필요를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통역을 장덕수(張德秀)가 했다. 이 여행에서 그는 고가 렌노스케와 18회 회동했으며, 노다 우타로(野田卯太郞) 체신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창했다. (여운형 친동생 여운홍의『몽양 여운형』)

그러나 이 당시 여운형의 행적을 보면 그는 회유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회유되었는지 여부는 다른 문제다. 그 시절에 총독부 외사국장의 소개장을 얻어 상해로 유학할 수 있었던 상황도 그의 행적에 흠이 되었다. 식민지에서 온 33세의 청년에 대한 대신들의 환대에 여운형 자신은 그것이 대세요, 중도 노선에 대한 우대라고 변호할 수도 있고, 그의 능력과 일본의 평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는 있지만, 그 뒷날의 운신에 업장이 되었고, 그에 대한 망명객들의 시선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그의 진면목이었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예수교 전도에 종사하던 여운형은 이에 참여해 외무총장을 임명받았으나 복벽(復辟·왕정복고) 노선에 불만을 품고 임정과 헤어졌다. 1920년 봄에 그는 김만겸(金萬謙)의 소개로 중국에 공산주의를 선전하러 온 보이틴스키(G Voitinsky)를 만났다. 이때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陳獨秀)와 일본공산당의 오모리 에이(大森榮)도 합석한 자리에서 보이틴스키의 권고에 따라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여운홍,『몽양 여운형』)


임시정부와는 왜 등을 돌렸나

여운형이 상해 임정과 등을 진 데 관해 다른 증언이 있다. 뒷날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창숙(金昌淑, 의정원 부의장)의 증언에 따르면, 임정 안에서 무슨 안건을 처리하면 곧바로 일본 영사관에서 알고 수사망을 좁혀왔다. 많은 사람이 여운형을 지목하자 김구가 그를 불러 문책했다. 이에 여운형은 자기가 일본영사관의 밀정 아오키(靑木)와 정보를 주고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고자 함이었다”고 변명했다. 이에 곁에 있던 김구의 측근들이 의자를 집어 던지고 어떤 이는 권총을 빼 들고 죽이겠다고 하자 여운형은 다급히 자리를 피해 남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 증언의 말미에 김창숙은 “여운형을 죽여 마땅하다”고 썼다. (『金昌淑文存』) 김창숙은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다. 이 사건은 뒷날 그의 독립유공자공적심사에 중요 논란이 되어 결국 2등급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이 무렵에 동방 정책에 주력하고 있던 건국 초기의 소련은 피식민지 민족에게 공산주의를 파급하고자 1922년에 이르쿠츠크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열었다. 여운형을 비롯한 김규식(金奎植)‧나용균(羅容均)‧박헌영(朴憲永)·김시현(金始顯)·홍범도(洪範圖)·현순(玄楯) 등 52명이 가던 길에 모스크바로 장소를 변경하자 다시 그리로 갔다. 블라디미르 레닌(V I Lenin)은 혁명의 열기를 보여주고 싶어 장소를 변경했다. 이때 주석단으로 피선된 여운형은 레닌을 두 차례 회견했다. 여운형은 레닌을 만나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외경과 공산주의에 대한 의구심으로 고민했다. 이 자리에서 레닌은 한국이 언제인가는 공산주의를 지향해야 하지만 지금은 민족주의에 몰두할 때라고 지적했고 여운형은 이에 공감했다.


손기정 일장기 말살 사건

모스크바에서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푸단대학(復旦大學)과 인연을 맺어 그 대학 축구 선수단 단장이 되어 1929년에 선수단을 인솔하고 동남아를 여행했다. 그는 이때 필리핀에서 좌경 노동 계급의 지도자와 조선인 거류민 등과 회합하면서 화교‧필리핀인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해 상호 원조의 필요를 계속 고취했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비난했다는 죄목으로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호송되어 3년형을 받았고, 1932년 7월에 출감했다.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한 여운형은 이듬해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이것은 그가 본국에 돌아온 뒤에 착수한 최초의 사업이었다. 그러나 1936년 7월 5일,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 말살 사건과 함께 신문이 폐간되고 그는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여운형은 1944년 8월에 동지들과 함께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해 말을 감추고(不言), 글을 남기지 않고(不文), 이름을 대지 않는다(不名)는 ‘3불(三不) 원칙’에 따라 지하 운동을 전개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의 청장년 시절은 이토록 부지런하고 어수선했다.

■ 📝 목차

「 〈제 1부〉 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
① 여인과의 만남은 박복했다…출신 다른 이승만·김구 공통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303

② 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987

③ 좌우 대립의 ‘불편한 진실’…右는 우익, 左는 좌익 죽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731

④ 가슴 따른 자, 머리 못 이긴다…김구와 이승만 ‘정해진 운명’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2924

〈제 3부〉 송진우와 장덕수,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① 송진우의 ‘찬탁론’ 와전됐다, 기어이 총을 쏜 광기의 시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0770

② 누가 장덕수를 암살했나…이승만·김구 그때 갈라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2422

〈제 4부〉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 평양서 김구 맞이한 첫사랑…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116

② 아버지는 자결, 조부는 친일…北 택한 홍명희 ‘기구한 3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569

③ 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이념 논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15

④ 北이 꾸민 가장 기만적 모임…‘남북협상’ 비극으로 끝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8833

〈제 5부〉박헌영,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① 박헌영, 이 가혹한 호적등본…생모는 첩, 직업 주막업 기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0650

② 남편 동지의 아이 가졌다…박헌영 아내의 ‘접촉사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2281

③ 스탈린은 박헌영 의심했다…모스크바 면접장서 생긴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860

④ '운명의 여인’ 현앨리스 재회…박헌영 죽음의 빌미 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5466

〈제 6부〉해방정국의 3대 비극
①항쟁이냐 공산폭동이냐…1946년 '대구 사건'의 진실(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7163

②혁명도 빨갱이 폭동도 아니다, 좌우가 왜곡한 대구사건 진실(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8831

[참고문헌]
Verba, Sydney, Political Culture and Political Development(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金昌淑文存』(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94)
‘여운형 공판 기록’, 『몽양여운형전집』(한울, 1991)
여운홍, 『몽양 여운형』(청하각,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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