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이래서 G8, G9이 되겠는가
■
「 9개월마다 바뀌는 국가안보실장
본인도 상대 파트너도 헷갈릴 것
이런 발상으론 외교강국 어림없어
」
"바이든이 시진핑보다 우월했던 게 아니다. 설리번이 양제츠·왕이보다 우월했던 것이다."
50년 넘게 미국·중국의 외교 현장을 워치해 온 일본의 한 국제관계 원로는 지난 4년의 미·중 외교를 이렇게 표현했다. 설리번은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우리로 따지면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인 국가안보실장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2020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하자마자 실시한 첫인사가 설리번이었다. 당시 만 44세.
46세에 닉슨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키신저보다 더 젊은 나이였다. 예일대를 3등으로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런 '스펙'보다 그가 더 자랑스러워하는 상장은 '세계 대학생 토론대회' 준우승. 그래서인지 그의 토론력과 논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듣는 방법, 사람들을 모으는 방법, 목표를 향해 전략화하는 방법을 정확히 이해하는 인물"(힐러리), "영리하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겸손하다"(클로부셔 미네소타주 상원의원)는 찬사를 지난 4년 내내 들었다.
'세기의 격돌'로 불린 2021년 알래스카에서의 미·중 외교수뇌부 회담. 중국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미국 생각이 곧 국제 여론일 것 같으냐. 절대 아니다. 자국 일이나 잘해라"고 도발했다. 이에 설리번이 이렇게 뼈 있게 받아쳤다. "자신 있는 국가는 모름지기 자신의 단점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개선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법. 그게 바로 미국의 비밀 소스(경쟁력 비결)이기도 하다." 국제 외교가에 회자하는 명언이 됐다.
하지만 난 설리번의 이런 능력보다 더 탁월한 능력에 주목한다. 설리번을 임기 내내 바꾸지 않고 기용한 바이든의 용인술이다. 서른 살에 상원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해 50년 넘게 국제정치를 관찰해 온 관록이다. 외교에서 핵심은 국익이다. 그리고 국익을 위해선 외교의 일관성과 신뢰성이 핵심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저간의 사정, 흐름을 꿰고 카운터파트 및 상대국과 때로는 맞장을, 때로는 마주앉아 설득할 수 있는 비결은 연속성이다. 이런저런 국제회의에 나가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바뀐 누구누구라고 합니다"라며 명함을 건네는 이들과 그런 관계가 맺어질 리 만무하다.
'믿을맨'을 뽑아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길게 보고, 믿고 맡기고, 참아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비단 미국만 그런 게 아니다. 중국은 시진핑이 2013년 국가주석 취임 이후 11년 동안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딱 두 사람만 뒀다. 양제츠, 그리고 현직인 왕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14일 차기 자민당 총재 불출마 의사를 밝힌 기시다도 만 3년 동안의 총리 임기 동안 아키바 국가안전보장국장 한 사람을 썼다. 그 자리는 자국은 물론이고 주요 상대국과 '함께 가는' 자리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지난 12일 새로 지명된 신원식 신임 국가안보실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 2년3개월 만에 네 번째다. 잦아도 너무 잦다. 대통령실이 설명하는 교체 이유는 늘 똑같다.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그런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1년 365일 매일매일 변하는 게 국제 정세 아닌가. 올 11월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또 바꿀 것인가. 다음 달 기시다 일본 총리의 후임이 정해지면 또 바꿀 것인가. 진작 바꿔야 할 내치 장관은 안 바꾸고, 바꾸면 곤란한 외교·안보 수뇌부들만 바꾸고 있다.
이쯤 되면 인사권자의 외교 철학과 비전 부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국가안보실장이란 자리의 기능과 무게를 아직도 잘 모르거나 ▶국가안보실장을 '바지사장'으로 번갈아 앉히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실질적 파워를 주고 있거나 ▶외교 또한 대통령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거나다. 짐작은 가지만, 어느 쪽이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런 주먹구구, 우물 안 개구리식 발상으로 무슨 외교 강국 G8, G9이 되겠는가.
김현기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내 새끼 상속세 물리기 싫다” 1000억 부자 포르투갈 간 이유 [강남 부자 절세법①] | 중앙일보
- 병원서 성폭행 후 살해된 인도 수련의…동료 의사들 무기한 파업 | 중앙일보
- "아파트 23곳 아직 싸다"…MZ가 쓸어담은 '그 동네' 어디 | 중앙일보
- '베드신 몸매 보정' 거부한 여배우, 이번엔 뱃살 당당히 드러냈다 | 중앙일보
- 박세리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부친 논란 2달 만에 심경고백 | 중앙일보
- "울릉도 오징어까지 파고든 일본…지금 독도가 위험합니다" [더 인터뷰] | 중앙일보
- 지석진 "韓 축구 정신차려라" 일침에…당황한 유재석이 보인 반응 | 중앙일보
- 폭염인데 선풍기만 켠 채로…에어컨 설치하던 20대 알바생 숨졌다 | 중앙일보
- '맥심 티오피' 16년 만에 새 얼굴 등장…원빈 밀어낸 'MZ 스타' 누구 | 중앙일보
- 성종 무덤에 주먹 크기 구멍…"새벽 2시 한 여성이 파헤쳤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