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 고무줄 정산 주기 ‘교통정리’ [큐텐제국의 몰락]
야당 ‘온플법’ 군불···‘오진’ 우려도
티몬·위메프(티메프) 사태 이후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커머스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정부도 이 같은 방향성에 동의하는 모습이다. 규제안을 제시한 강기룡 기획재정부 정책조정국장이 직접 “강력하고 직접적 규제를 모두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할 정도다. 민주당은 이번 사태를 동력 삼아 지난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온라인플랫폼법(온플법)’ 군불 때기에 나섰다. 당정을 중심으로 규제 일변도로 흘러갈 조짐을 보이자 이커머스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선 의견이 나뉜다. 일각에서는 전략적 오판에 따른 경영 실패를 규제 ‘사각지대’ 이슈로 치환했다간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고객 자금 유용을 막도록 안전판을 강화하되, 이커머스 산업 발전을 저해하지 않게 세밀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산 기한 일괄 규제
정부가 ‘제2의 티메프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칼을 빼 들었다. 지난 7월 7일 위메프 정산 지연으로 티메프 사태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한 달 만이다. 정부가 8월 7일 발표한 ‘티메프 사태 추가 대응 방안·제도 개선 방향’은 이커머스 판매대금 유용을 막는 게 핵심이다. 정부 발표안은 우선 이커머스와 전자지급결제대행(PG) 업체 정산 기한을 대규모 유통업자(40~60일)보다 짧은 수준으로 설정하기로 했다. 티메프 사태처럼 긴 정산 주기를 이용해 입점 업체에 갈 돈을 돌려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입점 업체에 갈 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앞으로 이커머스 업체와 전자지급결제대행사는 판매대금의 일정 비율을 제3자를 통해 별도 관리해야 한다. 예치, 신탁, 지급보증보험 등으로 안전성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규제 사각지대’로 지목된 상품권 발행 업체 선불 충전금을 100% 별도 관리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선불업자가 파산해도 선불 충전금 환급을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할 목적에서다. 정부는 이를 위해 대규모유통업법과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을 손본다는 계획이다. 강기룡 정책조정국장은 “이커머스 부실이 판매자나 소비자에게 전이되는 부작용을 막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정부 차원에서 이커머스 행위 규제에 대해 담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직접적 규제는 다 담으려 했다”고 강조했다.
야당에서는 지난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온플법’ 제정을 다시 꺼내 들었다. 플랫폼의 불공정거래행위, 거래 조건 협의 제도·분쟁 조정 등을 규정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다. 근본적인 사태 재발을 막으려면 플랫폼 기업과 입점 사업자 간 거래 관계를 규정하는 법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취지다.
플랫폼과 입점 업체 사이 ‘갑을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22대 국회에서 김남근·민형배·박주민·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온플법을 각각 발의했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소상공인위원회는 8월 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티몬이나 위메프에 입점한 업체들이 플랫폼 업체와 단체 협상을 통해 정산 기간, 거래 수수료 등을 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 온플법이 제정됐더라면 이번 대혼란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업 육성도 고려될 필요
온플법 논란 가속
정부와 정치권에서 이커머스 플랫폼 규제 움직임이 커지고 있지만, 전문가와 이커머스업계에선 당정과 온도 차가 감지된다. 구영배 대표의 모럴 해저드와 전략적 오판이 맞물려 사태가 확산했는데, 이를 규제 부재에 따른 결과로 해석하는 것은 ‘오진’일 수 있다는 것. 자칫 온라인 플랫폼 전반의 규제 강화로 이어져 성장 산업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남선 네이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티메프 사태를 단순 경영 실패로 규정했다.
김 CFO는 “티메프 사태를 에스크로(중립적인 제3자가 중개해 금전·물품을 거래하는 서비스) 제도 부재 등 시스템 문제로 돌리려는 분위기가 강하다”면서 “이 사태의 근원은 지극히 평범한, 흔히 볼 수 있는 경영 실패 사례”라고 지적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도 “이번 사태 원인은 규제의 미흡함보다 구영배 대표 개인의 일탈에 있는 것이지 회사가 자본잠식 상태에 있다고 해서 미수금을 못 주는 건 아니다”라며 “정부가 지나치게 사전 규제에 힘쓰게 되면 이커머스 산업이 힘들어질 수 있다. 기존에 유동성을 갖고 비즈니스를 하는 구조에서 갑자기 유동성이 사라져버리면 당장 사업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커머스를 금융이 아닌 유통업 시각에서 바라보고, 업계 현실을 반영해 규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산 기한에 관한 규정을 일률적으로 하면 이커머스 유통업 고유 특성이 사라진다”며 “이커머스를 금융업으로 보고 금융감독원의 규제·감독이 들어오면 유통업 기반인 이커머스 산업 경쟁력이 저해되고 해외 기업과의 경쟁에서 국내 산업이 밀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온플법’과 같이 플랫폼 사업에 대한 관리 기준과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제2의 티메프 사태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일각에서는 이커머스업계 변화가 빠르기에 정부 규제가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는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며 “하지만 이번 티메프 사태에서 봤듯, 플랫폼에는 많은 소비자와 판매자가 연결돼 있으므로 온플법처럼 판매자와 소비자 보호를 위한 기본적인 규제가 없다면 앞으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열심히 판 게 죄냐…세제 혜택·고용 안정 자금 필요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2호 (2024.08.14~2024.08.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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