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불출마 선언…지지율 바닥, 정치 불신 못넘은 기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67) 일본 총리가 추락일로였던 지지율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재선의 꿈을 접었다. 취임 3년, 임기 만료를 한달 여 앞둔 상태였다. 기시다 총리의 불출마 선언으로 총재선거를 향한 자민당 내 잠룡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기시다 총리는 14일 오전 기자 회견을 열고 다음 달 예정인 자민당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한국의 추석 격인 오봉(御盆) 연휴 속에 이뤄진 급작스러운 발표 탓인지 통상 총리 회견에 동석하는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관방장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회견장에 나타난 기시다 총리는 “이번 총재선거에서 자민당이 바뀌는 것을 국민에게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자민당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쉬운 첫걸음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자금 스캔들에 발목
20여분간 회견에 나선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말 불거진 정치자금 문제를 불출마를 결심하게 된 배경으로 꼽았다. “자민당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 간 유착, 자민당 비자금 스탠들 문제 등 정치불신을 초래하는 사태가 잇따라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치개혁으로 나아간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무거운 결단을 내렸다”고 강조했다.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20%대를 벗어나지 못하자 자민당 내에선 “이대로는 선거(중의원 임기 만료·2025년 10월)를 치를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듯 회견에서 기시다 총리는 ‘정치 개혁’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어떤 후보를 지지하겠느냔 질문에 ‘개혁 마인드’를 꼽았다. “총재선거를 통해 선택된 새로운 리더를 일개 병졸(兵卒)로 지지해 나갈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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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정치자금 잇단 위기…기시다의 위기
취임부터 재선 도전 포기 의사를 밝힌 1046일간 그의 임기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전임자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정권이 코로나 대응 실패로 1년 만에 물러나며 기시다 총리는 ‘듣는 힘’과 ‘외교’란 장점을 앞세워 고노 다로(河野太郞·61) 현 디지털담당상과 경합 끝에 총리직에 올랐다.
재임 기간 그는 30년간 이어진 일본 경제의 침체를 벗어난 듯한 기록적인 주가 상승, 전례 없는 임금인상률 등 크고 작은 성과를 올렸다. 이날 회견에서 기사다 총리는 한·일 관계 개선,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등도 성과로 꼽았다.
하지만 정치적 시련은 계속 됐다. 2022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피습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과 통일교와의 유착 문제가 불거졌다. 기시다 총리는 해당 종교단체 해산 카드로 맞섰으나, 지난해 말 자민당을 둘러싼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 한층 더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지난해 5월 자신의 지역구에서 열린 히로시마 G7(주요 7개국) 회담 때 56%(요미우리 신문)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은 20%대로 주저앉았다. 자신이 이끌던 파벌을 해체하는 등 강수를 뒀으나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데 실패했고, 보궐선거에서 자민당은 연이어 패배했다.
2주 전만 하더라도 최측근 기하라 세이지(木原誠二) 자민당 간사장 대리는 기시다가 “총재선거를 단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최근 중앙아시아 국가와 온라인 정상회담 등을 마치며 생각이 바뀐 것으로 전해졌다.
“새 얼굴 누구냐” 쏠리는 관심
기시다 총리가 불출마 의사를 밝혔지만 차기 총리의 윤곽은 안갯속이다. 자민당 내 주류를 잠식하던 아베파 등 파벌이 해체되면서, 의원들의 의견을 모을 구심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이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이시바 시게루(石破茂·중의원·67) 전 자민당 간사장은 당장 출마 의향을 내비쳤다.
지지통신에 따르면 이날 대만을 방문 중인 이시바 전 간사장은 “훌륭한 판단”이라며 “20명 추천이 정해지면 책임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출마에 필요한 추천인 구성 요건(20명)을 갖춘 뒤 출마하겠다는 의미다. 또 다른 잠룡인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68) 자민당 간사장은 기시다 총리의 결정에 대해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말을 아꼈다.
일본 언론 사이에선 유력 후보군으로 앞선 총재선거에서 기시다 총리와 경합을 벌였던 고노 디지털상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63) 경제안전보장상,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郎·82)전 총리의 아들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43) 전 환경상, 고바야시 다카유키(小林鷹之·49) 전 경제안전보장상 등이 거론되고 있다. 자민당 선거관리위원회는 오는 20일 회의를 열고 9월 20일부터 29일 사이 총재 선거 일정을 결정할 예정이다.
"한·일 관계, 당장 영향 없을 것"
전문가들은 기시다의 불출마와 새로운 총리 선출이 한·일 관계나 한·미·일 안보 협력 등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 라종일 전 주일 대사는 “한·일 관계가 궤도에 오른 상황이라 큰 틀에서 총리가 누가 되더라도 양국 관계 개선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윤덕민 전 주일 대사는 “11월 미 대선 결과를 봐야겠지만, 현시점에선 지난해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정상이 구축한 외교·안보 협력이 일본 총리 교체만으로 큰 변화를 보일 것으론 예상되지 않는다”고 했다.
니시노 준야(西野純也) 게이오대 교수는 “현재 일·한 관계는 윤석열 정부의 리더십에 힘입은 바가 크다"며 "윤 정부의 방침에 변화가 없어 현재 기조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니시노 교수는 “새 총리가 여론의 높은 지지를 받으면 한·일 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내년)일·한 국교정상화 60주년에 맞춘 새 공동선언 발표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오누키 도모코·김현예, 서유진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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