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 부활한 '조선총독부'... 오호, 통재라!
[오태규 기자]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제국의 불행한 패전이 있은 지 이십유여 년. 그간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정세도 크게 바뀌었거니와 특히나 제국의 아시아에 있어서의 자리는 어둡고 몸서리쳐지던 패전의 그 무렵에 우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전개되어 오고 있습니다.
<광장>의 작가 최인훈(1936~2018년)의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 서두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최인훈은 1965년 한일 협정 체결로 한국인 식민지 피해자 개인이 일본으로부터 피해 보상을 받을 길이 사라지고 문화재를 돌려받을 길도 없어진 것에 실망해, 1967년부터 1976년까지 내리 4편의 연작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당시 작가가 느꼈을 분노와 실망이 얼마나 컸던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35년 동안의 가혹한 일제의 식민 지배에 관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기는커녕 경협 자금 명목으로 5억 달러(무상 3억, 유상 2억)를 받는 걸로 퉁쳤으니, 시대를 고민하는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기가 차고 속상했겠습니까.
▲ 2023년 3월 16일 1박 2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의장대 사열에 앞서 양국 국기에 예를 갖추고 있다. |
ⓒ 연합뉴스 |
앞으로 한국 사람들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더욱 주체적·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다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하려는 게 작가의 의도였을 겁니다.
최근 한일 문제와 관련해 윤석열 정권이 하는 짓을 보면서 지금 작가 최인훈이 생존해 있다면 <총독의 소리>에 나오는 상황 설정과 줄거리를 전면 개작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는 총독이 굳이 한국 땅에 남아 밀정들과 함께 한국의 재식민화를 위한 '고난의 지하 투쟁'을 한다는, 그런 기상천외의 발상이 전혀 불필요할 테니까요. 바로 윤 정권이 소설에서 '조선총독부 지하부'가 하려고 하는 일을 백주대낮에 대놓고 자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윤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일제시대의 강제노동 피해자 해법으로 내놓은 '제3자 변제'가 '윤 정권의 조선총독부화'의 첫걸음이었습니다. 한국의 피해자보다 일본 정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법률 해석과 집행에서 최고의 권위와 힘을 지닌 대법원의 판결을 깡그리 무시했습니다. 대법원이 일본의 전범 기업에 정신적 위자료를 내라고 명령했는데, 윤 대통령은 삼권 분립과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한국 사람의 돈으로 대신 갚아주기로 '결단'했습니다.
▲ 정부가 일본 기업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3자로부터 판결금을 대신 변제받는 것이 가능하다며 향후 수령에 동의를 구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 피해자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사진은 2023년 1월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모습. |
ⓒ 연합뉴스 |
여하튼 자국 피해자의 요구와 대법원의 판결을 짓밟고 일본에 백기 투항한 이 반민족적인 조치를 신호로 윤 정권은 친일·종일의 길로 일로매진 내달려왔습니다. 육사에서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인 홍범도 장군 동상 들어내기, 외교·국방 백서에서 일본 비판 내용 없애기, 독도 영유권 주장 흐리기, 자위대와 협력 강화 등등 이전 정권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보훈청에서 자신의 저서를 보여주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이정민 |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와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민의 역사 인식과 정신에 큰 영향을 주는 국책기관의 장에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미화하는 부류를 차곡차곡 내리꽂아 왔습니다.
<총독의 소리>에서 총독이 하고자 했던 것처럼, 반도인의 정신 구조를 외세 지향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더 나아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찬양하고 미화하도록 뜯어고쳐 한국을 일본의 영구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인사 만행입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이 김형석의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두고 "용산 어느 곳에 일제 때 밀정과 같은 존재의 그림자가 있는 게 아닌가?"라고 분개한 뜻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대통령실이 이 모든 일을 지휘하는 사령부, 즉 '부활한 조선총독부'라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 일본 사도광산 내 터널(서경덕 교수 제공) |
ⓒ 연합뉴스 |
그래서 저는 사도 광산 외교 참사라고 부르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의도적인 사기극이기 때문입니다. 참사라는 단어 속에는 의도하지 않는 비참한 결과도 포함되는데, 이번 사도 광산 사건은 내막을 알면서도 앞장서 일본의 역사 고쳐쓰기를 도와준, 그것도 강제 노동자의 피와 땀을 희생하며 일본의 역사 세탁을 지원해 준 공범 행위입니다. 이 또한 용산 대통령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조선총독부임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오호, 통재라!
반도의 영유는 제국의 비밀이었습니다. 영혼의 꿈이었습니다. ...(중략)... 오늘날 제국은 이 비밀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본인과 본인의 휘하에 있는 전원의 비원도 이곳에 목표가 있습니다. 실지 회복, 반도의 재영유, 이것이 제국의 꿈입니다.
이 소설의 중간에 나오는 총독의 말입니다.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더욱 끔찍한 건 소설의 꿈이 현실화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친일 본색' 윤 정권의 등장에 용기를 얻은 소설 속의 총독이 지하 운동을 청산하고 지상으로 뛰쳐나와 윤 정권과 손잡고 그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아니 지금 한창 이루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