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개봉된 지브리 첫 애니, 거장이 선물한 완벽한 해피엔딩
[양형석 기자]
일본 현지에서 2022년 12월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국내에서도 지난해 1월에 개봉해 '슬램덩크 마니아'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488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비록 할리우드 영화처럼 동시 개봉을 하거나 세계 최초 개봉을 하진 못했지만 일본 현지와의 개봉 시차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 사실상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아니다.
일본의 대중문화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년 동안 4차에 걸쳐 개방됐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국내 시장에 들어왔다. 실제로 199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멜로 영화였던 <러브레터>는 국내에서 1999년 11월에 개봉했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1995년 3월에 개봉한 바 있다. 따라서 당시 국내의 일본 영화 마니아들은 이미 어두운 경로(?)를 통해 <러브레터>를 감상한 경우가 많았다.
▲ 초반에 등장하는 소피와 하울의 공중산책은 여성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
ⓒ (주)이수C&E |
당시 <모노노케 히메>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통해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미야자키 감독은 영국의 동화 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가 쓴 동명의 판타지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로 했다. 당초 미야자키 감독은 자신이 아닌 호소다 마모루 감독을 발탁해 작품을 만들 계획이었지만 호소다 감독이 중간에 하차하면서 미야자키 감독이 직접 나서 각본을 다시 쓰고 작품을 완성했다.
이복동생, 새어머니와 함께 영국의 작은 마을에 사는 소피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준 모자 가게를 운영하다가 황야의 마녀에 의해 90세 할머니로 변하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다. 다만 할머니가 된 후에도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은 여전해 이를 바탕으로 온갖 힘든 일들을 이겨 나간다. 소피는 작품의 주제이기도 한 '전쟁을 이기는 것은 사랑이다'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하울은 움직이는 성의 주인이자 마법사로 잘생긴 외모로 여성들의 심장을 빼앗아 간다는 소문의 주인공이다. 특히 소피와의 첫 만남에서 등장하는 소피와 하울의 '공중산책'은 많은 여성 관객을 설레게 했던 명장면이다. 작품 후반에 소피가 캘시퍼의 불을 끄면서 하울은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소피가 사랑의 힘으로 하울을 살려 내고 두 사람은 사랑을 확인하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무정부주의와 반전주의, 평화주의 등 미야자키 감독 특유의 주제가 고루 담긴 영화다. 일본 현지에서는 '마야자키 감독 최초의 러브 스토리'로 작품을 홍보했고 이는 국내 관객들에게도 전달돼 국내 흥행에도 영향을 끼쳤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미야자키 감독의 1980~1990년대 작품을 잘 알지 못하는 10~20대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와 하울 커플은 미야자키 감독이나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커플들 중에서 드물게 그 어떤 여운이나 다른 해석의 여지 없이 완전한 '해피엔딩'을 맞았다. 실제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센과 하쿠, <모노노케 히메>의 산과 아시타카, <마루 밑 아리에타>의 쇼우와 아리에타 등 다른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커플들은 재회를 약속하며 헤어지는 결말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천공의 성 라퓨타> 등 미야자키 감독의 초기작에 익숙한 마니아 관객들 사이에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특히 모호한 결말과 전작들에 비해 뚜렷하지 않은 작품의 메시지 등이 대표적인 비판 요소였다. 다만 원작자인 다이애나 윈 존스 작가는 "미야자키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며 애니메이션 버전을 극찬했다.
결과적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난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나오기 전까지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 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다음으로 성공한 애니메이션이 됐다. 국내에서도 '정상적으로(?) 개봉한 미야자키 감독의 첫 애니메이션'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으며 전국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2004년 개봉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현재까지도 일본 애니메이션 역대 흥행 순위 4위다.
▲ 소피는 90세 할머니가 된 후에도 여전히 부지런하고 발랄하게 움직인다. |
ⓒ (주)이수C&E |
미야자키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넘어 일본 영화계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감독으로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들은 크게 흥행했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2003년과 2024년 두 번에 걸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고 2015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을 정도로 일본을 넘어 세계 애니메이션계에서 '거장'으로 대우받고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 이전인 1984년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든 미야자키 감독은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같은 주옥같은 명작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애니메이션 팬들로부터 '미야자키 감독 최고 명작'으로 불리는 <모노노케 히메>를 만들면서 제1회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애니메이션 대상과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모노노케 히메> 이후 4년의 준비 기간 끝에 선보인 미야자키 감독의 신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세계적으로 3억 9500만 달러의 높은 흥행 성적과 함께 미국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2004년 차기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통해 2억 3700만 달러의 흥행과 함께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었을 때부터 이미 환갑을 넘긴 노장이었던 미야자키 감독은 2008년 <벼랑 위의 포뇨>와 2013년 <바람이 분다>를 선보였지만 신작 발표 간격이 점점 길어졌다. 결국 미야자키 감독은 2013년 9월 베니스 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미야자키 감독의 은퇴 선언 후 지브리 스튜디오의 해체설이 나왔을 정도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크게 흔들렸다.
이후 미야자키 감독은 2019년 "건강이 회복돼 다시 창작 욕구가 생겼다"며 복귀를 선언했고 2023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중 <하울의 움직이는 성>보다 많은 관객을 모은 작품은 단 세 편 뿐이다. |
ⓒ (주)이수C&E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