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학원 선생님이 독립운동가라니...71세에 겨우 훈장
[김슬옹 기자]
▲ 1990년 무렵 칠순 잔치에서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독립운동가 이두표(1919-2005) 선생 |
ⓒ 김슬옹 |
이분의 파란만장한 삶은 박영한 작가의 <장강>이라는 역사소설로 나왔으니 이제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라 할 수는 없으나 광복 후 46년 만에서야 그의 고귀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게 된 한 많은 이야기이다. 광복절이 다가오다 보니 젊은 시절 이분과 함께했던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다. 필자가 앞장서 이두표 선생이 건국훈장을 받게 된 사연이기도 하다.
기타 학원에서 만난 이두표 독립운동가
필자는 1982년에 대학에 입학했으나 전두환 군사 정부가 대학생 과외를 금지하는 바람에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1983년 무렵에는 신촌 사거리에 있었던 헬스클럽(5층, 서대문구 창천동 30-7, 광창빌딩)에서 숙식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6층 옥상에는 바로 이두표 선생이 직접 가르치는 이표 기타 학원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에서 독립운동하는 짬짬이 익힌 클래식 기타로 근근이 생활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계단을 따라 옥상까지 올라가 보면 신기한 광경이 나타난다. 입구에서부터 그림과 조각, 작업 중인 수제품 기타가 여기저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1990년 건국유족장을 받기 전까지 20년 이상을 허름한 이곳에서 클래식 기타 개인교습과 기타 제작을 하면서 일편단심 그를 내조해 온 아내와 함께 강직하게 살아온 자취들. 구릿빛 피부와 다부진 체구, 번뜩이는 눈매, 호탕한 웃음은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기타 교습이 끝나면 대학생 제자들을 데리고 꼭 뒤풀이를 하셨다. 제자들이 참알회를 조직해 정기연주회도 열곤 했다. 연세대 경제학부 이두원 교수도 참알회 출신이다. 뒤풀이가 길어질 때는 가끔 바로 밑에 층에 있었던 필자를 불렀다. 어느 날은 제2외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더니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셨다. 러시아 형무소에서 배웠다고 하면서 독립운동한 이야기를 무슨 영화 속 이야기처럼 길게 풀어놓으셨다. 처음에는 실없는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무슨 소설 속 이야기를 하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내용이 재판 기록으로 나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필자의 도움으로 국회도서관에서 찾아낸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 3권에 1940년 재동경 조선인 유학생 반전항일 예명회라는 조직을 통해 우리 독립 운동 집단 사건을 주도했다는 것이 실려 있었고 225쪽 '소화특고탄압사'라는 제목으로 1942년 재동경 조선인 민족주의 집단 사건으로 동경 경시청에 체포, 5년형을 언도 받은 사실이 실려 있었다. 이 기록 발견으로 1990년에서야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기록을 못 찾은 탓도 있지만, 이두표 선생은 젊었을 때는 대우를 받고자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며 연금 등에 소극적 태도를 지키셨다. 나이 들어 간간이 몸소 보훈처 등에 탄원하였으나 담당 공무원이 일본에 가 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로 대해 좌절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0세 다 되어서야 실제 기록을 국회도서관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는 함북 회령읍에서 태어나 경성군 주을로 이주하여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민족정신이 남달랐던 그는 1933년 5학년 때 '反日滿月一心光團(반일만월일심광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천황 불경죄로 일경에 발각되어 취조받았다. 1939년 회령상업학교 재학중 일본 동경 유학길에 올라 법문학부 철학과를 다니면서 반일 '여명회(黎明會)' 사건으로 동경 경시청에 피검, 스가모 구치옥에서 투옥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 후 귀향하여 1945년 주을반공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 중 소련에 유형되었다가 1950년에 귀국하였다.
소련 유형 중 우즈베크공화국 제일형무소에서, 중앙아시아 고간다 강제수용소에서 중노동의 나날을 보냈는데 여기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에서 사사끼 마사오라는 기타리스트에게 클래식 기타를 다년간 배운 일이 있어 항상 기타를 잊지 못 하고 있던 차에 수용소 목공소에 드나들면서 합판으로 기타를 만들어 전선줄을 끼어 즐겼는데 그 덕분에 소련경비원들에게 극진한 인기를 받았고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든 수용소에서 가끔 열리던 특기자랑 행사에 한국인으로서 기타를 연주하여 국위를 선양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하바롭스크 강제노동수용소 등을 전전하다가 1950년 6월 귀국, 북한반공회 유격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청춘을 항일 독립운동과 반공으로 일관해 왔다.
"대우 받고자 독립운동 한 것 아냐"...71세 되어서야 건국훈장 애족장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해방, 6.25 전쟁을 거친 현대사의 산증인이면서 동시에 기타 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그의 삶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1956년부터 기타 개인지도를 시작하여 후암동, 장사동, 문산, 서소문, 종로, 안암동을 거쳐 신촌 로터리에서 제자 양성을 마무리했다. <인간 화물>이라는 1200매에 달하는 자서전적 원고를 쓰기도 한 그는 주위에서 출판을 권유해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출판을 안 하다가 이 원고는 박영한 작가의 <장강>(1996) 소설의 바탕이 된다.
1990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도 받았지만 대가나 보상 없이 그저 바른길을 따라 살아온 그로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1990년 고희를 맞아 그동안 키워온 제자들이 마련한 기념연주는 세간의 화려한 음악회는 아니지만 제자들과 그의 연주로 꾸며지는 뜻깊은 무대가 되었다. 다음 시는 필자가 직접 써서 이 연주회에서 낭송한 시 전문이다. 추모삼아 그 때의 시를 그대로 싣는다.
통일 조국의 그날에사
당신의 소리를 바치시옵소서
하나
한겨레 모진 풍파를 온몸에 안으시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시베리아 대륙으로
당신 뜻을 펴신 날이
아름다운 선율로 오늘에 흐릅니다.
여기 선생님의 굵은 뼈마디 사랑을 기리고자
선생님의 질퍽질퍽했던 말씀과 호탕한 웃음으로 선율을 가꾸던 제자들이
알알이 한마당에 모였습니다.
소리와 그림과 조각이 어우러진 허름한 골방에서
우리의 손끝은 선생님의 눈빛 따라
사랑과 역사와 철학과 예술을
여섯줄로 엮어 내곤 했습니다.
일번 줄에서는 고난의 역사를
이번 줄에서는 사랑의 본능을
삼번 줄에서는 니체의 철학을
사번 줄에서는 예술의 열정을
오번 줄에서는 역사의 분노를
육번 줄에서는 통일 조국의 열망을
밤새워 사르곤 했습니다.
조국의 거센 시련에
스스로 인간 화물 되어 반도에서 섬으로 섬에서 대륙으로
달려야 했던 지난 날을 어찌 노래로 다 부르리까?
친일의 무리들이 반쪽 조국마저 가로채고
떵떵거리는 분단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며
갈라진 고향 산천 부르며 술로 지새우던 아픔을
어찌 훈장(건국훈장 애족장)이 대신 하오리까?
둘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 보통학교 5학년 개구장이 시절에
새총에 일제에 대한 울분을 날리던 날에
어느 누가 식민지 아들이라 비웃었겠습니까?
일본 천황 히로히토, 해군대장 도오고(東鄕), 육군대장 노오기(乃木)는
아이들의 새총에 무참히 사살되고
안중근 의사에게 이미 죽은 이토오히로부미는 또 다시 저승에서 혼이나고
뒷골목에서는 그저 티없는 개구장이였지만 척박한 땅에 흐르던 일제의 모진 바람 앞에서는 독립 투사의 아들이었다 하나이다.
식민지 조국의 아픔을 삭여 주던
포크기타로만으로 울분을 달랠길 없어 더 큰 뜻을 품고 바다 건너
적국의 땅으로 유학을 오르니
이제 기타는 악기가 아니라 항전의 무기였다 하나이다.
니체와 헤겔과 칸트를 되뇌이며 기타를 어깨 매고 항일 전선 무대 올라
일 번 줄에 당신의 혼을 놓으니 겨레 사랑 노래로 퍼지고
이 번 줄에 당신의 혼을 놓으니 일제에 대한 분노로 울리고
삼 번 줄에 당신의 혼을 놓으니 동지들의 독립가로
사 번 줄에 당신의 혼을 놓으니 조국광복 염원의 노래가
오 번 줄에 당신의 혼을 놓으니 고향 땅의 새봄의 노래가
육 번 줄에 당신의 혼을 놓으니 배달청년들이 한몸으로 어울렸다 하나이다.
손 끝마다 흐르는 예술의 혼은
칼날같은 적국의 땅에서 독립의 불길되어 타오르고
기타 소리 속에 독립 투쟁 문서 담아
바람처럼 일제의 본토를 누비니
재일 조선 학생들의 여명회는 조국 광복의 여명이었다 하나이다.
동경 스가모 형무소의 모진 고문도 당신의 선율만큼은 잠재우지 못해
조국 광복의 젊은이로 우뚝 서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국의 시련은 끝이 없어 이내 분단의 시련 속에서니 고향 땅에 소련의 지배를 거부하니 이내 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 형무소 5년 세월 속으로
조국은 또 다른 시련으로 잠기어 갔습니다.
그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변치않는 조국혼과 예술혼은
당신을 그 잔인한 땅에서 우뚝 서게 했습니다.
합판에 전선줄로 새로운 소리를 연주하니
그 투박한 사람들은 한겨레의 정기어린 예술혼에
끝없는 노래를 불렀다 하나이다.
5년의 유형의 혹독한 바람은 당신을 이내 분단 조국의 산하에서
총을 들게 하고
그 애타던 조국 독립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이내 조국 산하는 분단 되어
고향 잃은 당신의 눈빛은 슬픔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셋
저 북녘의 고향을 그리며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조각하는 당신의 손에서
인간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붓놀림에서
차이나타운의 풍경을 연주하는 손에서
어느 누가 형무소 지하 감방의 울부짖음을 듣겠습니까
어느 누가 시베리아 대륙의 그 사나운 바람 소리를 듣겠습니까
애써 술과 그림과 조각과 소리로 고향 그리움을 빚어 보았지만
이내 메아리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애타는 여정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잇는 알이 잉태되었으니
참알이었다 하나이다.
후암동에서 장사동으로, 장사동에서 문산으로
문산에서 서소문으로, 서소문에서 종로로
종로에서 안암동으로, 안암동에서 신촌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사랑과 철학과 예술과 조국을 연주하시니
때로는 울분으로
때로는 회한으로
때로는 희망으로
현대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대로
감성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감성으로
여섯줄의 어우러짐은
사랑과 철학과 예술과 조국이 하나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한 잔 술에
기타 선율을 안주 삼아
선생님의 호탕한 웃음을 연주하면
남녀 한 쌍의 조각이 꿈틀대고 바이올린의 아가씨는 너울너울 춤을 추고
동경 스가모 형무소 그림은 분노로
시베리아의 수인 열차는 역사의 저 들녘으로 사라지니
사글세방은 이내 우리 역사의 한마당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예술은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한결다움으로 흐르기에
변치않는 민족혼은
잠자던 역사 자료를 깨어 나게 하고
이내 건국훈장 애족장에 빛났습니다.
칠순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당신의 걸으신 길을 알리심은
훈장으로 대신할 수 없는 역사의 가치 때문이었다 하나이다.
통일 조국의 그날에사
열 여섯살의 티없이 맑은 열정이 다시 흐르리니
더없이 정정함으로 젊은 영혼 가꾸소서.
통일 조국의 그날에사
한겨레 모진 풍파 끝나려니
그날에사 가녀린 선율로 조국의 근대사를 증언하소서.
통일 조국의 그날에사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 노래로 흐르려니
그날에사 당신의 소리를 바치소서.
- 참알회를 대표하여 김슬옹
2005년 86세의 나이로 서거했을 때 대전 현충원에 필자가 제자들을 대신해 기초한 묘비는 이렇게 적었다.
▲ 1990년 무렵 칠순 잔치에서 이두표 선생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시를 낭송하는 필자. |
ⓒ 참알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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