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1장 열 달' 그려 병상 부친과 영상통화...그 그림 전시회
코로나 19로 요양병원의 아버지와 만날 수 없게 됐다. 화가니까, 매일 한 장씩 그려 간병인과 영상통화를 하며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유근택(59)은 2021년 8월에는 아버지 얼굴을 그리고 ‘아버지 괜찮아요’라고 썼다. 9월에 그린 풍경화에는 ‘아버지, 가을 하늘이 슬프게도 파래요’라고, 12월에는 아버지 얼굴을 그리고 ‘아버지 감사해요, 수고 많으셨어요’라고 적었다. 그림은 임종 면회조차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침대까지 10달간 이어졌다. 그 중 81점이 서울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의 한 전시실을 꽉 채웠다.
한지와 먹을 쓰는 강미선(63)은 최근 서촌의 100년 가까이 된 한옥을 고쳐 살게 됐다. 공사 중 땅속에서 주춧돌, 사기 조각, 서까래 등을 발견했다. 집의 역사와 이야기, 흔적이 거기 있었다. 전시장 한 벽을 채운 ‘나의 서가도’에는 소반ㆍ장독ㆍ문창살 등 일상의 부분을 그려 넣었다.
‘주로 선에 의해 이미지를 그려내는 기술, 또는 그런 작품’. 표준국어대사전은 ‘드로잉’을 이렇게 정의한다. 서울 올림픽공원에 자리 잡은 소마미술관이 개관 20주년 특별전 ‘드로잉, 삶의 철학을 그리다’를 25일까지 연다. 숯의 작가 이배(68), 개념미술가 안규철(69), 레고 블록과 비즈로 산수화를 만든 황인기(73), 김명숙(64) 등 중견 화가 6명의 드로잉과 철학자 이진우ㆍ허경의 이야기를 담았다.
‘드로잉과 삶의 철학’이라는 키워드로 꾸린 작가별 미니 회고전이다. 레고블록으로 가로 7m 가까운 대작 산수화 ‘오래된 바람 1101’을 만든 황인기는 “‘찌릿찌릿’하고 ‘번쩍번쩍’하는 일을 해 왔는데 여기까지 왔다”고 돌아봤다. 1971년 서울대 공대를 중퇴하고 미대 회화과 졸업 후 뉴욕으로 유학 간 그는 전시장 내 영상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대로, 좋아하는 것을 하자”고 말했다.
안규철은 전시장에 삽과 사다리를 뒀고, 벽을 뚫었다. 삽과 사다리에 대한 드로잉과 글도 걸었다. 높은 데서 작업할 때 쓰는 사다리와 땅을 파는 데 쓰는 삽은 인간 활동영역의 양극단에 있는 노동자의 상징이다. 스케치북에 연필로 사다리와 각각 삽을 그리고 사물의 정의부터 제작과정, 재료, 사용과 관리방법, 부작용까지 사물의 특성을 적어 내려간 작가는 이어 사물의 일반적인 용도 뒤에 숨겨진 의미와 우리네 삶의 진실까지 더듬어 나간다. 세워서 쓰는 접이식 사다리, 벽에 기대어 쓰는 사다리 등 종류별로 사다리를 그린 뒤 적은 글은 이렇다.
" “높이 오르려는 사람이 추락의 위험을 줄이려면,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단단한지, 사다리가 자신을 지탱할 만큼 튼튼한지, 기울어지거나 넘어가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서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높이 올랐다고 방심할 일이 아니다. 추락의 위험이 곳곳에서 빚을 받으려는 빚쟁이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매일 아침 일어나 같은 스케치북에 같은 포맷으로 30분에서 1시간 정도 쓰고 그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는 “어제보다 오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만큼 중요한 목표가 있겠나”라며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밤하늘에 달이 떠서 밤새 지나가듯 조명받지 않는 시간도 꿋꿋이 잘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장엔 삽과 사다리 연작 뿐 아니라 사과(謝過), 수고로운 공회전 등 지난 30년 간의드로잉 20여 점이 걸렸다.
전시장 밖 올림픽조각공원에서는 마우로 스타치올리, 루이스 부르주아, 헤수스 라파엘 소토, 세자르 발다치니 등의 조각을 볼 수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아 열린 ‘세계현대미술제’ 참여 작품들이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소마미술관은 이 조각공원의 관리를 위해 ‘서울올림픽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 개관했다. '예술가의 몸짓에 의한 언어'라는 관점에서 드로잉에 주목해 왔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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