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가 카메라 빌리고 류승완이 영화 배운 공간, 역사의 뒤안길로
[성하훈 기자]
▲ 대한극장 별관 철거 전(왼쪽) 모습과 철거 진행 중(오른쪽)인 현재 |
ⓒ 성하훈 |
대한극장 별관은 대한극장 옆 식당가 골목에서 50m 들어간 곳에 위치한 작은 5층 건물로 1970년대~1990년대 영화인들의 추억이 많이 서린 곳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영화운동의 주역들이 사무실로 이용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난 12일 철거공사가 진행 중인 건물 앞에는 공사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법원의 집행결정문이 붙어 있었다. 건축물 철거 기한은 8월 15일까지로 명기됐다.
'충무로 사랑방'이자 진보 영화소식지 편집공간
영화계 인사들에 따르면, 대한극장 별관에는 1970년대 고 이영일 평론가, 1980년대 양윤모 평론가의 사무실이 있었다, 전양준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그곳에 고 이영일 선생님이 발행했던 잡지 <영화예술>의 편집실이자 연구실이 있었고 양윤모 평론가도 연구실을 오래 유지했다. 민간 시네마테크 운동의 선구자였던 고 이언경이 영화공간 1895를 시작한 곳으로, 가난하고 억압받았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에 세 분과 영화적 사유를 공유했던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 양윤모 평론가가 대한극장 별관에서 연구실에서 편집했던 소식지 <충무로 영화> |
ⓒ 주진숙 제공 |
당시 영화 청년들의 단체였던 '영화마당 우리'가 이전해 온 이후 젊은 영화인들이 모인 장산곶매는 이들의 스터디룸을 이용해 5월 광주항쟁을 다룬 첫 장편영화 <오! 꿈의 나라> 기획과 제작을 진행했다. 또 영화공동체라는 상영 및 보급(배급) 단체가 입주해 전국적인 보급(배급) 상영을 담당하는 사무실로 기능했다. 1990년 결성된 한국독립영화협의회(현 독립영화협의회)도 이 건물에 사무국을 뒀고, 1991년에는 독립영화워크숍이 처음으로 개최됐다.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는 "이때 오점균 감독(1기), 이종혁 감독(1기), 양남실 PD(1기), 김태일 감독(2기), 이동하 PD(2기, 현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 류승완 감독(3기), 강혜정 PD(5기) 등이 교육과정을 수료했다"며 "봉준호 감독이 첫 단편영화 <백색인>을 만들 때 촬영에 사용된 16mm 카메라를 독립영화협의회에서 빌려갔다"고 덧붙였다.
1989년 11월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생들의 졸업작품 시나리오 검열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을 당시엔 검열로 제작 지원을 못 받은 작품의 기획과 편집 작업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장기철·금보상·김은주 감독 등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방북한 임수경(전 국회의원) 관련 소재와 청년노동자, 학원 프락치 사건 등을 내용으로 한 졸업작품을 제작하려다 사회적인 내용에 정치성을 뗬다는 이유로 제작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부당한 검열에 따른 피해를 입어 정식 졸업이 아닌 수료증을 받아야 했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작품을 완성했다.
노효정(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2기), 정동환(감독, 서울예대 영화과), 권칠인(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2기, 전 인천영상위원장)의 공동 작업실로 젊은 영화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일명 '노동인'이 있던 공간이기도 했다.
이정향 감독은 "충무로의 처우가 열악한 때였지만 영화현장에 발을 디딘 젊은 영화인들을 보듬고 챙겨주는 곳이었다"며 "세 명의 가난한 조감독들이 월세를 내며 운영하면서 정보가 필요하거나 조언을 구하고자 할 때는 콜센터 같은 역할을 했다. 누구든 찾아와 막막함을 해소하던 공간이었다"고 추억했다.
이밖에 박광수 감독(부산영화제 이사장)의 <그섬에 가고 싶다>(1993) 기획 과정에서 프로듀서를 맡았던 박기용 감독(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의 작업 공간으로 쓰였다.
▲ 대한극장 별관 철거안내 표지판 |
ⓒ 성하훈 |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건물 노후로 철거한다며 입주자들을 퇴거시키고 오랜 시간 방치된 공간으로 남아 있다가 더 유지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다방의 푸른 꿈>을 연출한 김대현 감독은 "처음 저 건물에 들어갔던게 1988년 여름이고 1990년대 초중반까지 좁은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렸다"며 "충무로를 오가던 영화인이나 관객 모두에게 추억이 많은 공간이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전양준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각기 다른 시간대의 기억과 지난 시간의 그리움이 떠오른다"면서 "이영일 평론가 이후 저 건물을 사용했던 사람이나 단체 중 순응주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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