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칵 치미는 울분…‘행복의 나라’가 바라본 그때 그 시대
김예슬 2024. 8. 14. 06:01
14일 개봉한 영화 ‘행복의 나라’(감독 추창민)는 한국 근현대사의 최고 격변기인 지난 1979년을 조명한다. 10·26 사태가 촉발한 정치 재판과 12·12 군사반란, 그 속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개인에게 주목한다. 영화는 익히 알려진 김재규를 모티브로 삼지 않는다. 그의 휘하에 있던 군인 박흥주의 재판을 두고 당시 시대상과 희생되는 개개인을 다룬다.
지난 8일과 13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각각 만난 추창민 감독과 배우 조정석, 유재명은 ‘행복의 나라’를 두고 “사람에 집중한 영화”라고 입을 모았다. 영화는 정인후(조정석)의 시선을 따라 부조리한 당시 현실을 들여다본다. 박태주(이선균)는 강직한 군인이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상관을 좇아 궁정동 안가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에 가담한다. 그의 재판은 졸속으로 진행된다. 부친에게 쓸 돈을 마련하고자 엉겁결에 사건을 맡은 변호사 정인후는 사안을 관성적으로 대한다. 늘 그랬듯 편법적으로라도 그를 살리고자 하지만 박태주는 거짓을 말할 바엔 죽음을 택하려 한다. 고군분투하려는 정인후를 10·26 사건 합동수사단장인 전상두(유재명)가 주시한다. 전상두는 정인후가 영 거슬린다. 영화는 각 인물과 뾰족하게 얽히는 정인후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 관객의 감정선을 능숙하게 건든다.
연출을 맡은 추 감독은 “특정 사건이 아닌 시대를 논하려 했다”고 짚었다. 앞서 영화 ‘그때 그사람들’(감독 임상수·2005),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2020),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2023) 등 굵직한 영화들이 당시를 무대 삼았다. 감독은 “특정 인물보다 야만적인 시대 속 권력자와 권력을 차지하려 한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인후는 당시 재판을 맡은 인권 변호사들을 집약해 새로이 가공한 결과다. 박태주는 실존 인물인 박흥주에 기반을 두고, 권력자에게 희생될 수밖에 없던 비운의 인물로 표현된다.
정인후를 맡은 조정석은 “박태주에게 동화한다는 마음으로” 연기에 임했다. 극에서 정인후는 답답하리만치 강직한 박태주에게서 제 아버지를 본다. 박태주의 자녀에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투영한다. 그는 유연한 변호사다. ‘맞고 틀리고’가 아닌 ‘이기고 지고’의 관점으로 재판에 접근한다. 언뜻 시대극과 거리가 먼 인물로도 보인다. “정의를 논하기보다 박태주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성장하는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조정석)는 설명이다. 추 감독 역시 “위대한 변호사가 아닌 세속적이며 변화하는 인물”을 그리기 위해 조정석을 캐스팅했다. 집요한 추창민 감독과 끈질긴 조정석이 만나자 캐릭터엔 생동감이 더욱더 살아난다.
유재명이 연기한 전상두는 뱀 같다. 그는 조용히 스산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합을 맞추던 조정석도 일순 압도됐을 정도다. 처음 시나리오를 본 유재명은 안갯속에 갇힌 기분을 받았다고 한다. 캐릭터를 드러낼 만한 장면이 별로 없어서다. “극도로 절제된 서사와 분량”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상두를 살벌하게 연기한다. 전상두는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면서도 인물 사이 연결고리로서 기능한다. “오만한 신념”은 유재명이 전상두를 풀어간 열쇳말이다. 비틀린 신념을 정당화하려는 권력자는 더없이 권위적이고 위선적이다. 유재명은 “단순히 악마처럼 표현하기보단 시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면서 “배우로 태어난 만큼 한 번쯤은 이 역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돌아봤다.
격변기를 조준하며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행복의 나라’에 무게를 더한 건 고(故) 이선균이다. ‘행복의 나라’는 지난해 말 사망한 그가 남긴 마지막 유작이다. 박태주의 말로는 이선균과도 겹쳐 있다. 영화가 더욱 먹먹함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울분과 울컥함, 치열함이 어우러지며 ‘행복의 나라’는 관객의 마음을 마구 흔든다. 모두가 아는 역사를 직시하며 분노가 솟구치다가도 눈물이 왈칵 치밀기도 한다. 작게나마 통쾌함을 느낄 곳도 있다. 사건에 집중한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인간 내면과 상황의 변화에 중점을 둔 작품이다. ‘서울의 봄’이 시대를 정면으로 조망하고 ‘남산의 부장들’이 개인의 야욕과 혼란을 표현했다면 ‘행복의 나라’는 “빛의 사각지대에 놓인 개인을 짓밟는 시대의 야만성”(유재명)에 주목한다. 이들 배우와 감독은 “타 작품들과 비교보다는 당시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관객 각자의 해석에 맡기고 싶다”고 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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