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내가 지킨다…파수꾼 김철 (5)
항저우(杭州).
중국 저장성의 성도다. 중국인들은 하늘에 천당이 있고 땅에 쑤저우(苏州)‧항저우가 있다고 했다(上有天堂, 下有苏杭). 쑤저우와 항저우가 그만큼 살기 좋은 지역이란 뜻이다. 쑤저우는 장쑤성의 도시다. 항저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시후(西湖)다. 시후를 보러 항저우에 갈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다.
항저우에는 한국인이라면 시후와 함께 떠올릴 곳이 또 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유적지다. 항저우시 장생로 55호(호변촌 23호)에 있다. 임시정부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가 미친 듯이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김철‧안공근‧엄항섭은 프랑스 조계지 환룡로(環龍路) 119호로 잠시 피했다. 그리고 상하이 교통대학 체육교사 한인(중국 국적) 신국권의 주선으로 일찍이 알고 지내던 미국인 선교사 피치 목사 집에 은거했다. 다시 김구‧이동녕‧엄항섭‧김의한‧박찬익 등은 자싱으로, 이시영‧조소앙‧김철‧송병조‧차리석 등은 항저우로 피신했다.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옮겼다.
항저우로 간 임시정부는 김철의 숙소였던 청태 제2여관 32호를 ‘임시정부 판공처’로 사용했다. 임시정부 항저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1933년 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지금의 장생로 55호(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해 1934년 11월까지 사용했다. 임시정부는 이 청사가 일제에 노출되자 1934년 11월 28일 서대가 도환리 12호로 옮겼다. 임시정부는 항저우에서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활동했다. 3년 6개월. 그리고 장쑤성 전장(镇江)으로 이동했다.
항저우에 가서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유적지 기념관은 2007년 11월에 개관했다. 기념관은 2014년 중국 국무원이 ‘국가급 항일전쟁 기념시설‧유적지로 지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급 평가를 받았다. 서울에 유학 온 중국인 왕하오(王皓)씨는 “고향이 항저우인데 친구들과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관심 있는 중국인이면 방문하는 필수 장소”라고 강조했다.
기념관 1층에 들어서면 사진 3개가 있다. 전문가가 아니면 낯설게 느껴지는 인물들이다. 왼쪽부터 김철‧송병조‧양기탁 등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다. 이 3명이 항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주역이다. 이 가운데 김철은 임시정부의 ’파수꾼‘으로 평가받는 독립운동가이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위원‧교통차장‧교통총장 대리‧법무장‧국무위원‧군무장‧재무장‧국무회의 비서장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임시정부에 ‘왜 교통총장이 필요하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대한민국도 아닌 중국에서 말이다. 당시 교통총장은 국내와의 연락‧정보 수집‧국내 동포와 일제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함으로써 임시정부의 활동 방침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다. 그리고 모든 인적‧물적 이동에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김철이 상하이로 망명한 것은 1917년이다. 그는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조선총독부는 가만두지 않았다. 일본 유학생의 식민통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철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지 않으면 국내 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상하이로 망명한 것이다.
김철은 망명한 이듬해 청년 독립운동단체인 신한청년당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6인의 창당 멤버는 김철‧여운형‧장덕수‧선우혁‧조동호‧한진교 등이다. 이들은 신한청년당을 1918년 8월부터 준비해 11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창당했다. 신한청년당은 여운형이 터키 정치인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에서 힌트를 얻어 지은 것이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은 1918년 12월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것과 1919년 2월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촉구한 일이다.
또한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는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29명 가운데 무려 9명이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
김철은 1919년 2월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고향인 전라남도 함평에 들러 자신 몫의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으로 마련한 뒤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3월 하순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보창로(寶昌路) 329호 건물에 신규식‧여운형‧서병호‧선우혁 등과 함께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그때 김철은 선우혁과 함께 재무를 담당했다. 이들이 재무를 맡게 된 것은 독립운동자금을 위해 국내에 파견돼 활동했기 때문에 자금 확보와 운영을 잘할 것이라 판단됐기 때문이다. 독립임시사무소에서 재무를 담당한 일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김철은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위원‧회계검사원 검사장‧재무장 등을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청사를 옮기는데 마지막 청사가 상하이 마당로(馬當路) 306농 4호에 있다. 1926년 3월~1932년 4월 말까지 사용한 이 청사는 누구 이름으로 임대했을까? 바로 김철 선생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임시정부는 1925년 4월 7일 2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채택했다.
초대 국무령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이상룡이다. 하지만 다른 국무위원들이 취임을 거부했다. 국무위원들이 대부분 만주에서 활동하는 무장 독립운동가였다. 김동삼‧김좌진‧오동진‧조성환 등이다. 이들은 만주를 비우고 상하이로 갈 수 없었다. 이상룡 국무령 체제는 1925년 9월 시작했지만 1926년 2월로 끝났다.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잠시 혼란기를 겪었다.
마당로 임시청사로 이전한 1926년 3월이 그때였다. 이상룡 국무령이 물러나고 양기탁‧안창호가 국무령 취임을 거절하면서 무정부 상태가 돼 버렸다. 김철 명의로 임대한 것은 그가 당시 국무위원은 아니었지만, 임시정부 초기 재무부위원과 회계검사원 검사장 등을 역임해 재무에 밝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17년부터 상하이에 거주해 여러 가지로 중국 사정을 잘 아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임시정부 항저우 시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에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임정 요인들이 항저우‧자싱‧하이옌(海盐) 등 3곳으로 흩어져 있었다. 하이옌은 추푸청의 며느리 집안 별장이 있던 곳으로 일제가 포위망을 좁혀오자 김구 선생이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임시정부와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둬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철은 이 어려운 시기에 재무장‧국무위원‧국무회의 비서장을 맡아 송병조‧양기탁‧차리석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켰다. 과로였을까? 갑자기 1934년 6월 29일 급성 폐렴으로 항저우 광자병원에서 순국했다. 48세.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으며, 항저우 악비묘의 뒷산에 있던 호산당 예수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 이후 이곳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김철의 묘소 위치도 알 수 없게 됐다.
2016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항저우에서 열렸다. 그때 시진핑 주석과 박근혜 대통령은 시후(西湖) 국빈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시 주석은 “항저우는 한국과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다”며 “한국의 유명한 지도자인 김구 선생께서 1930년대 3년 정도 저장성 항저우에서 일본과 투쟁을 하셨고 중국 국민은 그를 위해 편의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또한 시 주석은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장군이 1996년 항저우 옆에 있는 하이옌을 방문해 ‘음수사원(飮水思源) 한중우의(韓中友誼)’라는 글자를 남겼다”고 강조했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은 ‘물을 마시며 근원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김신 장군은 아버지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왔던 추푸청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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