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내 인생의 플랜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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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기가 막힌 뉴스를 들었다.
강남의 넓은 아파트에 살며 외제 승용차를 몰던 가장이 아내와 딸들을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직의 위기에 처하자 현재 생활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에 대해 불안감이 컸다고 했다.
물론 재판에 이기면 좋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가 불충분해서 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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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기가 막힌 뉴스를 들었다. 강남의 넓은 아파트에 살며 외제 승용차를 몰던 가장이 아내와 딸들을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직의 위기에 처하자 현재 생활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에 대해 불안감이 컸다고 했다. 강남 집을 팔고 집값이 좀 더 저렴한 지방으로 이사 갔으면 새로운 일을 시작할 투자금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안타까웠다. 물론 그만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의 불가피한 사정이었는지 답답했다. 불현듯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대학생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등록금 마련이 쉽지 않았는데 지도 교수님께서 내 사정을 듣고 장학생으로 추천해줬다. 한 학기에 한 번씩 장학금 수여식을 했다. 선배님들이 장학생들에게 맛있는 밥도 사 주고, 멘토로서 좋은 말씀도 해줬다. 한번은 사업에 성공한 선배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들었다.
“인생을 고속도로라고 치면 말이지, 나는 항상 1차로로 달려왔어. 늘 최선의 길, 가장 좋은 길을 가려고 했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당돌하게 선배님에게 되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1차로를 달릴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애물 같은 것이 있어서 가로막혀 있다면요?”
선배님은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다시 자신만만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2차로로 달려야지! 그다음 가장 좋은 길로 말이야. 하하.”
왜 그때 그런 질문을 했을까. 아마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인생의 1차로를 달리고 싶지만, 그럴 환경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요? 태어날 때부터 2차로, 3차로를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요?’ 뉴스에서 접했던 가장도 항상 1차로로만 달려왔기에 2차로, 3차로로 달릴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요즘도 조정실에서는 늘 1차로로만 달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재판을 걸었으면 무조건 이길 것으로 생각하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법원에 정의가 살아 있다면 당연히 제가 이기지 않겠습니까? 저 사기꾼 같은 나쁜 놈의 말을 믿는다고요? 말도 안 되지요.”
“충분히 증거가 차고도 넘칩니다. 합의서는 없지만, 녹음해 둔 내용도 있고요, 지금까지 계속 상대방도 모두 다 인정했던 내용이라고요.”
하지만 재판에서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물론 재판에 이기면 좋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가 불충분해서 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거야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면 되지 않겠냐고? 막상 상대방이 재판에서 이긴다면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호락호락 쉽게 합의를 봐줄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기고 질 확률이 반반이라고 생각했을 때, 만약 지게 되면 들 소송 비용과 시간을 생각해 보시지요. 이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질 경우의 플랜 B도 생각해 보셔야지요. 지금 당장은 조정하실 생각이 없더라도, 일단 재판을 진행해 보다가 분위기 보셔서 합의하시는 게 낫겠다 생각하시면 언제든 재판부에 조정을 요청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항상 1차로만 달려갈 수는 없다.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을 때, 비관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멀리서 장애물을 내다보고 차선책을 준비해 둘 것인가. 그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다.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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