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1인당 소득 첫 한·일 역전과 ‘투키디데스 함정’
일본 사회는 힘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안정된 수직 사회’로 묘사된다. 한국 사회는 옳고 그름을 또박또박 따지는 ‘시끄러운 수평 사회’로 그려진다. 단순화 오류가 있겠지만, 힘이 중요한 수직 사회인 일본은 오랜 사무라이 전통의 유산이고 옳고 그름을 중시하는 수평 사회인 한국은 선비 문화의 유산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종류의 ‘괴롭힘(harassment·일본에선 ‘하라’ ‘하라스멘트’로 발음)’이 사회 문제가 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직장 등에서 행해지는 성희롱을 뜻하는 ‘세쿠(sexual) 하라’와 직장 상사가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이용해 부하 직원을 괴롭히는 ‘파워 하라’다. 힘이 쎈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갑질하는 현상은 뿌리 깊게 남아있는 수직 사회 일본의 유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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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저 등으로 한국이 첫 일본 추월
한·일의 갑을관계에 근본적 변화
G7 가입해 인식 지체 바로잡아야
」
일본에서 발행하는 새 1만 엔(약 8만7000원)권 지폐에 과거 한반도 경제 침탈의 장본인인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1840∼1931)가 등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시부사와는 구한말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하고 일제 강점기 경성전기(한국전력의 전신) 사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일제의 한반도 경제 침탈에 앞장선 인물로 비판받아 왔다.
일본은 불편해할 한국 측의 눈치 같은 건 전혀 살피지 않는다. 여전히 일본이 한국에 힘으로 앞선다는 인식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 사회에 가하는 파워 하라의 한 단면으로 읽힌다. 한·일 관계가 많이 정상화 됐다지만 갈등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는 본질적 이유는 바로 이 파워 하라의 존재가 아닐까. 하지만 필자가 2021년에 출간한 책(『한일역전』) 이름처럼 실제로 한·일 역전이 벌어지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파워 하라는 이제 수명을 다하고 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지난해 기준으로 사상 처음 일본을 제치면서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에서 6위를 차지했다. 지난달 공개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2024년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는 더욱 놀랍다. 한국은 지난해 28위에서 올해 사상 최고 기록인 20위로 도약했다. ‘30·50클럽(국민소득 3만 달러·인구 5000만 명 이상)’에 속한 7개국 중에서 한국은 미국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일본은 한국에 한참 뒤처져 38위였다.
첨단 디지털 사회를 구축한 한국이 아직도 아날로그 사회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을 많은 분야에서 앞서나가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 하는 사실이다. 이런 변화는 한·일 양국의 갑을 관계에 근본적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물론 한·일 국민소득 역전에는 기록적인 엔화 약세도 작용했다. 엔화는 37년여 만에 최저 수준을 갈아 치웠다. 역사적인 엔저를 불러온 요인에서 일본인의 불행을 초래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엔저 요인은 무엇일까. 소프트뱅크 그룹 손정의 회장은 “일본 경제의 저력이 상당히 약해지고 있다”면서 구조적 문제가 주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엔저는 일본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는 감정의 영역을 넘어 한·일 역전 현상이 가져올 국제정치적 함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몇 년째 격화하는 미·중 전략 패권 갈등을 설명한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일 역전 현상이 내포하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는 한·일 양국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맞닥뜨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일이 이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 지름길은 하루빨리 일본과 한국의 갑을 관계를 확실히 뒤집는 것이다. 역사적 가해자가 ‘을’의 위치로, 피해자가 ‘갑’의 위치로 자리바꿈한다면 지금보다는 양국 관계가 평온해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숫자에 나타난 국가 경쟁력에서는 이미 양국의 위치가 바뀌었지만, 두 나라 국민의 인식은 변화가 늦다. 이로 인해 여전히 한국에 대한 일본의 파워 하라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해소할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은 한국이 조속히 G7(주요 7개국)이든 G9이든 확실한 주요 선진국 클럽에 가입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구체적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인식 지체 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계적 강국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 이를 관철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함은 물론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명찬 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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