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ADHD 앓는 감독, 컴퓨터 챙겨 시골로 줄행랑친 사연

김상목 2024. 8. 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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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작 리뷰] <공드리의 솔루션북>

[김상목 기자]

영화는 감독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럴 만하다. 수많은 영화 애호가의 휴대전화나 컴퓨터 바탕화면을 장식하는 <이터널 선샤인>의 미셸 공드리 아닌가. 두고두고 우려내듯 소환되는 해당 작품 외에도 감독만이 보여주는 초현실적 환상 세계에 빠져든 이들은 전 세계에 적지 않다. 좀 더 감독에 대해 정통한 이들이라면 1990년대부터 그의 유명세 초석이 뮤직비디오 명작들을 줄줄이 읊어댈 테다. 강렬한 개성 탓에 블록버스터 흥행 감독에 등극하진 못했지만, 오히려 열광적인 지지층을 형성한 감독이라는 데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대개 천재 소리 듣는 감독이 마치 알에서 태어난 듯 비범한 배경과 떡잎을 보이며 순탄 대로를 달려왔을 거라 상상한다. 하지만 특출한 재능은 평범한 이들이 감당하기 힘든 탓에 오히려 축복이 아닌 저주처럼 인식되곤 한다. 세상의 몰이해는 견딜 수 있지만, 믿고 신뢰하는 동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건 비극이다. 그런 난관을 극복하며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이들의 드라마는 어떤 모습일까.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그 모범 답안을 제시한다.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괴짜 감독, 컴퓨터 챙겨 시골로 줄행랑

모니터를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신작 영화의 촬영 분량을 검수하는 자리다.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다. 어색한 분위기는 한참 계속된다. 정장을 입은 제작자 그룹은 이대로는 절대 진행을 허가할 수 없다며 격앙된다. 감독은 담배 좀 피우고 오겠다며 바깥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는 비흡연자였고, 핑계를 댄 건 줄행랑을 치기 위한 알리바이였다. 감독은 아래층 사무실로 달려가 황급히 촬영된 영상이 들어간 컴퓨터 등을 몽땅 챙겨 스태프들과 함께 도망간다. 작품이 제작자에게 넘어가 임의 편집될 운명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들 일행은 감독의 숙모가 사는 시골 마을로 향한다. 이곳에서 시간을 끌고 버티면서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이다.

고향에 돌아와 나름대로 심기일전한 감독은 그동안 복용하던 ADHD 관련 약을 끊기로 한다. 복용을 중단하자 머릿속에선 아이디어가 샘 솟듯 분출하기 시작한다. 감독은 신이 난다. 얼른 창의 넘치는 생각을 현실화하고 싶다. 하지만 예술적 실천에 기꺼이 손발이 되어야 할 스태프들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감독은 분노에 휩싸인다. 그는 계속 짜증을 부리고 억지 요구를 밤낮 가리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분노가 치밀어올라 주체할 수 없다. 전화기와 그릇을 던지고, 폭언을 일삼는다. 스태프들은 감당이 안 된다며 고개를 흔들고, 숙모는 그를 말리느라 진땀을 흘린다.

감독 '마크' 역시 상황이 순탄하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위대한 걸작을 만드는데, 왜 다들 안 된다고만 하는지 속이 상한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화를 내고 사람들을 못살게 굴다가도 진정되고 나면 사과에 바쁘다. 사과하는 중에도 욱하고 또 사고를 저질러 사과에 사과를 덧붙여야 한다.

이 와중에 촬영본을 회수하려는 제작자의 압력이 조여들어 온다. 그런 상황인데도 '마크'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멈추지 않는다. 갑자기 영화음악을 새로 만들자 하고, 초 거물 팝스타를 섭외해 보라고 스태프들에게 강짜를 부린다. 암초에 봉착한 지금 영화는 제쳐놓고 스태프들에게 차기작 아이디어를 전시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지쳐 쓰러지고, 그의 곁을 떠나간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치면 마지막 카드가 있다. 비장의 무기인 '해결-책'이다. 감독은 마법의 주문처럼 난국의 해결 방법을 손수 작성하기 시작한다.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천재성 이면에 감춰진 고독과 불화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감독의 자전적 경험담에서 언급된 '해결-책'을 둘러싼 이야기다. 놀랍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선보여온 감독의 상상력이 현실 장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영화 속 '마크'까지는 아닐지언정, 온갖 시련에 좌절하며 주위에도 상처를 안겼을 테다. 그런 감독의 자기 반영 체험이 이 영화에 한가득 뿌려진다. 그 용감한 고백 과정은 관객에게 '영화감독'이란 직함을 단 이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영화 내내 '마크'는 당혹스러운 존재다. 그는 명성도 있고 작품성을 인정받는 감독이다. 그가 나고 자란 시골 마을에선 주민 모두가 그를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특출한 재능에는 이면이 존재하는 법. '마크'는 평범한 이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집중력을 가졌다. 세상은 그런 감독의 양면성 중 재능에만 관심이 있다. 하지만 그런 번뜩이는 창의를 뽑아내기까지 그의 시간 중 8할은 못 말리는 기행의 연속이다. 영화 내내 그 8할의 시간이 그려진다. 보고 있자면 정신 사나워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다.

스태프들은 그런 '마크'의 일상 행태에 이골이 나 있다. 감독의 그런 면을 소화하지 않고 장기간 함께 일하기란 불가능하다. 요즘 세대 시선이라면 그의 스태프들은 '보살' 같은 존재다. '마크'가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채 폭발하는 온갖 무례와 모욕에도, 스태프들은 화가 나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작업한다. 새벽 2시에 덜컥 들이닥쳐 진척 상황을 캐묻거나, 거물 음악인과 대기업 회장 미팅을 왜 못 잡았냐는 감독의 투정을 묵묵히 견딘다. 오랜 경험은 물론, 관객은 들여다보지 못한 감독의 천재성과 영화에 대한 집념을 이해하기 때문일 테다.

스태프들을 업고 다녀도 모자라지만, 감독은 하지만 늘 불만이 가득하다. ADHD 증상을 가진 이들이 발휘하는 고도의 집중력은 평범한 이들에겐 무리라는 걸 배려하지 못한다. 24시간 내내 아이디어만 나오면 바로 구체화해야만 공회전을 멈출 수 있는 '마크'다. 다른 이들이 밤샘하건 말건 그에겐 오직 '영화' 뿐이다. 늘 자신의 수족처럼 누군가 대기해야 한다. 오히려 영화인보다는 간병인의 인내와 돌봄 측면이 강조되는 지점이다.

물론 '마크'는 행동은 정반대일지언정, 주변에서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들에게 감사한다. 문제는 그런 감사 표시가 상대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이지만 말이다. 실용적으로 일 처리에 골몰하는 이들 앞에 마음을 표시한다며 당장 아무 쓸 데가 없어 보이는 기발한 장치를 밤새 끙끙 앓아가며 제작해 헌사와 함께 바치지만, 정작 상대의 반응은 기막혀하는 표정에 불과하다. 그런 일을 겪으면 왜 저들은 나의 진심을 몰라줄까 또 홀로 고립에 빠진다. 서로 참 단단히 꼬여도 꼬인다.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사랑'으로 위기 극복하는 동료 향한 헌사

그런 사고 연발 상황에도 대체 왜 이들은 마치 전생에 무슨 악연으로 엮인 것처럼 끝까지 함께 하는 걸까. 상업영화 제작 환경에 부속으로 전락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화'를 하고 싶은 공통의 열망이다. 물론 촬영을 마친 영상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태프들도 온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먹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제작자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던지는 이 영화가 '5백만 유로' 짜리라는 일갈에는 다들 수긍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제작 환경을 고려해야 할 테지만, 그들의 작업이 오직 화폐로만 환산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하는 결정적 원소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고민을 이 감독이 제대로 알아먹긴 하는지 의구심이 드는 게 문제다.

그런 난국에도 주변 인물들이 감독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 건 '마크'가 같이 일하기 참 힘들긴 해도 위대한 천재성을 갖고 있다는 인정 때문일 테다. 여러 번 기적적인 찰나를 목격했기에, 작업 내내 그가 보이는 한심한 작태를 인내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그런 감독의 면모는 종종 극적 찰나를 연출한다. 모두가 전자메일 열어보지도 않을 거라 만류하지만, 뚝심으로 팝 스타 섭외에 도전해 기어코 '스팅'과 OST 녹음을 완수한다. 전문 지휘자를 내쫓고 50명 연주자를 지휘해 그가 추구하는 사운드트랙 색깔을 구현하는 데 성공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만행(?)에 질색하던 스태프들이 어느 순간 '마크'의 기괴한 동작에 연주자들이 반응하며 음악이 탄생하는 찰나를 목격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저런 걸 목격하면 기대를 거두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정작 '마크'는 혼자만의 몽상 속에서 자신이 온갖 난관을 돌파하며 체득한 교훈을 수록한 자신만의 '해결-책'을 완성해 가는 여정을 이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치곤 하는 자기 계발 서적이나 심지어 화장실에 부착된 값싼 격언 정도 내용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감독과 동료들의 좌충우돌 경험이다. 미셸 공드리가 감추고 싶을 법한 과거를 녹여낸 '마크' 캐릭터는 위대한 천재 감독의 기인 면모가 아니라,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솟구치는 재능을 주변에서 어떻게 어르고 달래가며 완성해 왔는지 보여주는 거울로 오롯이 기능한다. 치부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 '고백록'이다.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미셸 공드리의 전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만든 이는 그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스태프였다. 우리가 화면 너머로 보던 경이로운 환상 세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지, 지치지 않는 창의력은 어디에서 발현되는지 엿보는 '꿀팁'을 목격한 덕분에 <공드리의 솔루션북>을 좀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흥행 압박에 시달리고 타협도 해야 하지만, 관철할 건 무슨 수든 버티고 맞서온 작가와 그를 신뢰하며 함께한 동료들의 일대기, 그리고 스태프들에 대해 바치는 헌사가 기묘한 촌극처럼 보이는 영화 안에 온전히 녹아 있다. 그야말로 '영화감독이란 종족의 뇌 속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영화'다.
아울러 영화의 역사를 은유하는 상징들로 가득한 '영화사 보물찾기' 지도로도 손색이 없다. 영화의 탄생이 과학기술 실험 중 우연한 발견이라는 점,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출발점 같은 키워드가 가득 숨어 있는 걸 발견하는 재미가 가득하니 말이다.
 영화 포스터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작품정보>

공드리의 솔루션북
The Book of Solutions, Le Livre des solutions
2023 | 프랑스 | 코미디
2024.08.14. 개봉 | 103분 | 15세 관람가
감독/각본 미셸 공드리
주연 피에르 니네, 블랑슈 가르댕, 프랑수아즈 르브항, 프랭키 발라크, 카밀 러더퍼드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공동배급 (주)하이스트레인저
공동제공 ㈜케이엔엔미디어플러스

2023 76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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