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ADHD 앓는 감독, 컴퓨터 챙겨 시골로 줄행랑친 사연
[김상목 기자]
영화는 감독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럴 만하다. 수많은 영화 애호가의 휴대전화나 컴퓨터 바탕화면을 장식하는 <이터널 선샤인>의 미셸 공드리 아닌가. 두고두고 우려내듯 소환되는 해당 작품 외에도 감독만이 보여주는 초현실적 환상 세계에 빠져든 이들은 전 세계에 적지 않다. 좀 더 감독에 대해 정통한 이들이라면 1990년대부터 그의 유명세 초석이 뮤직비디오 명작들을 줄줄이 읊어댈 테다. 강렬한 개성 탓에 블록버스터 흥행 감독에 등극하진 못했지만, 오히려 열광적인 지지층을 형성한 감독이라는 데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 그린나래미디어(주) |
모니터를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신작 영화의 촬영 분량을 검수하는 자리다.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다. 어색한 분위기는 한참 계속된다. 정장을 입은 제작자 그룹은 이대로는 절대 진행을 허가할 수 없다며 격앙된다. 감독은 담배 좀 피우고 오겠다며 바깥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는 비흡연자였고, 핑계를 댄 건 줄행랑을 치기 위한 알리바이였다. 감독은 아래층 사무실로 달려가 황급히 촬영된 영상이 들어간 컴퓨터 등을 몽땅 챙겨 스태프들과 함께 도망간다. 작품이 제작자에게 넘어가 임의 편집될 운명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들 일행은 감독의 숙모가 사는 시골 마을로 향한다. 이곳에서 시간을 끌고 버티면서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이다.
고향에 돌아와 나름대로 심기일전한 감독은 그동안 복용하던 ADHD 관련 약을 끊기로 한다. 복용을 중단하자 머릿속에선 아이디어가 샘 솟듯 분출하기 시작한다. 감독은 신이 난다. 얼른 창의 넘치는 생각을 현실화하고 싶다. 하지만 예술적 실천에 기꺼이 손발이 되어야 할 스태프들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감독은 분노에 휩싸인다. 그는 계속 짜증을 부리고 억지 요구를 밤낮 가리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분노가 치밀어올라 주체할 수 없다. 전화기와 그릇을 던지고, 폭언을 일삼는다. 스태프들은 감당이 안 된다며 고개를 흔들고, 숙모는 그를 말리느라 진땀을 흘린다.
감독 '마크' 역시 상황이 순탄하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위대한 걸작을 만드는데, 왜 다들 안 된다고만 하는지 속이 상한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화를 내고 사람들을 못살게 굴다가도 진정되고 나면 사과에 바쁘다. 사과하는 중에도 욱하고 또 사고를 저질러 사과에 사과를 덧붙여야 한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 그린나래미디어(주) |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감독의 자전적 경험담에서 언급된 '해결-책'을 둘러싼 이야기다. 놀랍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선보여온 감독의 상상력이 현실 장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영화 속 '마크'까지는 아닐지언정, 온갖 시련에 좌절하며 주위에도 상처를 안겼을 테다. 그런 감독의 자기 반영 체험이 이 영화에 한가득 뿌려진다. 그 용감한 고백 과정은 관객에게 '영화감독'이란 직함을 단 이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영화 내내 '마크'는 당혹스러운 존재다. 그는 명성도 있고 작품성을 인정받는 감독이다. 그가 나고 자란 시골 마을에선 주민 모두가 그를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특출한 재능에는 이면이 존재하는 법. '마크'는 평범한 이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집중력을 가졌다. 세상은 그런 감독의 양면성 중 재능에만 관심이 있다. 하지만 그런 번뜩이는 창의를 뽑아내기까지 그의 시간 중 8할은 못 말리는 기행의 연속이다. 영화 내내 그 8할의 시간이 그려진다. 보고 있자면 정신 사나워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다.
스태프들은 그런 '마크'의 일상 행태에 이골이 나 있다. 감독의 그런 면을 소화하지 않고 장기간 함께 일하기란 불가능하다. 요즘 세대 시선이라면 그의 스태프들은 '보살' 같은 존재다. '마크'가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채 폭발하는 온갖 무례와 모욕에도, 스태프들은 화가 나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작업한다. 새벽 2시에 덜컥 들이닥쳐 진척 상황을 캐묻거나, 거물 음악인과 대기업 회장 미팅을 왜 못 잡았냐는 감독의 투정을 묵묵히 견딘다. 오랜 경험은 물론, 관객은 들여다보지 못한 감독의 천재성과 영화에 대한 집념을 이해하기 때문일 테다.
스태프들을 업고 다녀도 모자라지만, 감독은 하지만 늘 불만이 가득하다. ADHD 증상을 가진 이들이 발휘하는 고도의 집중력은 평범한 이들에겐 무리라는 걸 배려하지 못한다. 24시간 내내 아이디어만 나오면 바로 구체화해야만 공회전을 멈출 수 있는 '마크'다. 다른 이들이 밤샘하건 말건 그에겐 오직 '영화' 뿐이다. 늘 자신의 수족처럼 누군가 대기해야 한다. 오히려 영화인보다는 간병인의 인내와 돌봄 측면이 강조되는 지점이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 그린나래미디어(주) |
그런 사고 연발 상황에도 대체 왜 이들은 마치 전생에 무슨 악연으로 엮인 것처럼 끝까지 함께 하는 걸까. 상업영화 제작 환경에 부속으로 전락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화'를 하고 싶은 공통의 열망이다. 물론 촬영을 마친 영상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태프들도 온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먹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제작자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던지는 이 영화가 '5백만 유로' 짜리라는 일갈에는 다들 수긍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제작 환경을 고려해야 할 테지만, 그들의 작업이 오직 화폐로만 환산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하는 결정적 원소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고민을 이 감독이 제대로 알아먹긴 하는지 의구심이 드는 게 문제다.
그런 난국에도 주변 인물들이 감독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 건 '마크'가 같이 일하기 참 힘들긴 해도 위대한 천재성을 갖고 있다는 인정 때문일 테다. 여러 번 기적적인 찰나를 목격했기에, 작업 내내 그가 보이는 한심한 작태를 인내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그런 감독의 면모는 종종 극적 찰나를 연출한다. 모두가 전자메일 열어보지도 않을 거라 만류하지만, 뚝심으로 팝 스타 섭외에 도전해 기어코 '스팅'과 OST 녹음을 완수한다. 전문 지휘자를 내쫓고 50명 연주자를 지휘해 그가 추구하는 사운드트랙 색깔을 구현하는 데 성공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만행(?)에 질색하던 스태프들이 어느 순간 '마크'의 기괴한 동작에 연주자들이 반응하며 음악이 탄생하는 찰나를 목격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저런 걸 목격하면 기대를 거두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 그린나래미디어(주) |
▲ 영화 포스터 이미지 |
ⓒ 그린나래미디어(주) |
공드리의 솔루션북
The Book of Solutions, Le Livre des solutions
2023 | 프랑스 | 코미디
2024.08.14. 개봉 | 103분 | 15세 관람가
감독/각본 미셸 공드리
주연 피에르 니네, 블랑슈 가르댕, 프랑수아즈 르브항, 프랭키 발라크, 카밀 러더퍼드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공동배급 (주)하이스트레인저
공동제공 ㈜케이엔엔미디어플러스
2023 76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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