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가야 하니 관을 두껍게 만들지 마라"

이재우 2024. 8. 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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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유언 시리즈 1화] 사약을 앞에 두고도 아랫사람을 걱정했던 조광조

조선 선비들의 유언을 통해 삶의 지혜와 통찰을 배워보고자 한다. 의로운, 이상적인, 유유자적한, 때론 청빈한 선비들의 유언은 유언에 그치지 않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과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기자말>

[이재우 기자]

 용인 광교산 산행을 하다 ‘조광조 묘소’ 안내판을 만났다.
ⓒ 이재우

1519년 12월 19일, 구중궁궐의 임금, 중종은 이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한때 개혁 정치를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댔지만, 이제는 척을 진 신하 조광조의 목숨이 다음날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움은 없었다. 증오만 남았을 뿐. 심사는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이앓이(치통)' 고통은 또 왜 이리 심한가? 조광조의 죽음에 이앓이까지 더해지면서 중종의 몸은 새우처럼 오그라들었다.

필자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생각하면서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 내용에 근거하여 '중종의 하룻밤'을 위와 같이 묘사해 보았다.

다음 날인 12월 20일, 금부도사 유엄(柳渰)이 조광조의 유배지인 전라도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에 사약을 가지고 도착했다. "조광조를 사사(賜死)하라"고 임금이 전교를 내린 것이 12월 16일이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조광조의 묘. 올해 2월 25일 방문.
ⓒ 이재우
나흘 만에 금부도사가 들이닥친 것이다. 앞서 11월 25일 능성에 와서 25일 동안 귀양을 살았던 조광조였다. 실록(1519년 12월 20일 자 중종실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유엄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내가 글을 써서 집에 보내려 하니, 끝나고 나서 죽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하십시오."

조광조는 방에서 생의 마지막 시를 지었다(해석 한국고전번역원 참고).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였고)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백일림하토(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위에서 굽어보노니)
소소조단충(昭昭照丹衷: 나의 충심을 환히 비춰주리라)
 조광조 묘역 초입에 있는 돌 표지석.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백일림하토(白日臨下土), 소소조단충(昭昭照丹衷)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 이재우
광교산 산행에서 우연히 조광조 묘소를 만나다

필자가 위 시를 처음 접한 건 3년 전 이맘때였다. 당시 용인 광교산 산행을 하고 있었는데, '조광조 선생의 묘 5.3km'라는 안내판을 보곤 "조광조 묘소가 근처에 있었구나"라며 무작정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양조씨 문중 선산 묘역(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의 작은 야산). 조광조는 거기 잠들어 있었다. 묘역 초입에 있는 돌 표지석에 새겨진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의 시를 보는 순간 조광조에 '빙의'라도 된 듯 몸이 굳어버렸다. 시에선 임금에 대한 원망도, 증오도 없었다. 오로지 충심만 있을 뿐이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던 날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사약을 들이켰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자, 몇 차례 더 가져오게 해 마시고 절명했다고 한다. 서른여덟 '미완의 개혁가'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실록은 조광조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마라. 먼 길 가기 어렵다."
(吾死棺宜薄, 毋令重厚 遠路難歸)

조광조의 시신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 거두었다. 양팽손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여러 차례 조광조의 구명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당하여 고향 능성으로 내려와 있었다(화순 죽수서원과 용인 심곡서원엔 조광조와 양팽손이 함께 모셔져 있다).

조광조의 말대로 화순에서 선산이 있는 용인까지는 멀고도 먼 길,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 왔다. 기묘년에 일어났던 살벌한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죽음으로 그렇게 일단락됐다.

필자는 올해 2월 25일 조광조 일가의 묘역을 일일이 돌아봤다. 조광조의 증조부 조육, 조부 조충손, 아버지 조원강, 형 조영조, 아들 조용의 묘가 작은 야산에 함께 있다. 5대의 묘가 한 자리에 있으니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햇살까지 골고루 묘역에 내려앉고 있었다.
 뒤쪽에서 바라본 조광조의 묘. 작은 야산에 조광조 일가 5대의 묘가 함께 있다.
ⓒ 이재우
조광조의 무덤 앞에서 그와 가상 대화를 나누다
묘역 제일 꼭대기에 있는 조광조의 묘로 향했다. 먼저 그의 무덤 앞에 큰절을 올렸다. 그리곤 무덤의 웃자란 풀을 잠시 정리해 주었다. 필자가 조선 선비들의 무덤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일종의 '작은 의식'이다. 필자는 다소 생뚱맞지만, 무덤의 조광조를 불러내 보고 싶었다. 다음은 실록의 팩트에 초점을 맞춰 필자와 조광조가 나눈 가상 대화다.
 조광조 묘역 인근의 심곡서원. 효종이 심곡(深谷)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조광조와 양팽손을 모시고 있다. 올해 2월 25일 방문.
ⓒ 이재우
"정암 선생님, 정암 선생님."

간절하게 그를 불렀다. 희미하게 그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문중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구려."
"정암 선생의 무덤 앞에 서는 건 이번이 두 번째군요. 선영 인근 선생을 모신 심곡서원(深谷書院)도 몇 차례 찾았지요."
"다시 한번 고맙소."

"학자도, 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 마니아' 입장에서 여쭤보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의 도학 정치 꿈이 한순간에 무너져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실록은 '선생이 요직을 차지하여 국론과 조정을 그르쳤다'는 죄목을 들고 있습니다." (1523년 2월 28일 자 중종실록)
"당치도 않소. '나는 국맥(國脈)을 무궁한 터전에 새롭게 하고자 하였을 뿐이고 다른 뜻은 전혀 없었다'고 임금에게 말하였소." (1519년 11월 16일 자 중종실록)

"저 또한 선생의 소신에 동감합니다. 혹시 소격서 폐지, 현량과 설치, 공신들의 위훈 삭제 등 선생의 개혁 정치가 다소 급진적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들어보시오. 기자 양반. '개혁이 급진적이었다'는 주장은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문제는 우리 신진 세력이 아니라고 봅니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 기득권 훈구 세력의 개혁 배척, 그리고 열아홉 나이에 임금 자리에 올라 훈구 세력에 의해 휘둘린 중종의 태생적 한계, 그 2가지가 더 큰 문제가 아니겠소?"
 도봉산에 있는 도봉서원 터. 지금은 터만 남았다.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훗날 송시열이 추가로 모셔졌다. 지난 8월 11일 방문 사진.
ⓒ 이재우
"선생은 사후에 '조선 사람의 상징'처럼 평가받고 있지요. 선생을 흠모하는 후학들의 대열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고 문묘에 배향까지 되지 않았습니까."
"내겐 그저 과분할 따름이오."

필자가 가끔 찾는 도봉산에는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도봉서원이 있었다. 조광조를 모시고 훗날 송시열이 추가로 모셔졌다. 그 도봉서원 터 건너 계곡에 암각 글씨 하나가 있다. '고산앙지(高山仰止)'다.

고산앙지는 <시경>에 나오는 말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라는 뜻이다.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조광조를 존경하여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수증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로 맞섰던 김상헌의 손자다). 필자는 오가며 그 암각 글자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보곤 했다.

"그건 그렇고, '먼 길을 가야 하니 관을 얇게 만들어라'는 선생의 유언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글쎄올시다. 굳이 말하자면 나 스스로 가벼운 영혼으로 가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겠소. 관을 운구하는 아랫사람들의 수고로움도 덜어주려고 했던 것 같소."
 도봉서원 터 건너편 계곡에 있는 암각 글씨 ‘고산앙지(高山仰止)’. <시경>에 나오는 말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라는 뜻인데,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조광조를 존경하여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글씨 ‘지(止)’는 항상 물에 잠겨 있다.
ⓒ 이재우
조광조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는 유배를 살았던 집 주인(관노 문후종)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조광조는 "내가 너의 집에 묵었으나 보답은 못 하고 도리어 너에게 흉변(凶變)을 보이고 너의 집을 더럽히니 죽어도 한이 남는다"고 말했다. 집을 온전하게 돌려주지 못한 미안함을 표현한 것이다. 관노에게조차 말이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소 이야기를 꺼냈다.

"제 생각에 선생께서는 심지어 관을 끌고 가는 소의 무거운 심정까지 헤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허허, 그렇게까지. 기자 양반이 이렇게 말을 걸어 날 불러내 주니 거듭 감사할 따름이오. 잘 돌아가길 바라오."

조광조가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근사록(近思錄)>이라는 책에 '시민여상(視民如傷)'이라는 말이 나온다. '백성(아랫사람) 보기를 아픈 사람 대하듯 하라'는 뜻이다. 정암 조광조. 그가 딱 그렇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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