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본토 점령한 우크라, 서방에 "장거리미사일 공격 허가해달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으로 러시아를 충격에 몰아넣은 가운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더 깊숙이 공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서방 동맹국에 호소했다. 장거리 공격이 가능해지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축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푸틴은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손을 빌려 우리와 싸우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고, 러시아는 이들을 확실히 몰아낼 것”이라며 대대적인 반격을 예고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젤렌스키는 이날 서방 동맹국을 향해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깊숙한 곳을 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다시 한번 간청한다”고 호소했다. 이미 자국군이 국경을 넘어 본토에 진입한 상태에서 장거리 미사일 사용이 가능해지면 “푸틴의 통치를 끝낼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현재 우크라이나가 지원받은 서방의 장거리 미사일은 미국의 에이태큼스(ATACMS)와 영국의 스톰 섀도 등이다. 서방 각국은 확전을 우려해 지원한 미사일을 방어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했고, 러시아 본토 공격은 금지한 상태다. 현재 젤렌스키는 국방부와 외교부 관리들에게 장거리 미사일 사용에 대한 서방 동맹국의 허가를 받기 위해 필요한 조치 목록을 제시하라고 지시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에서 반격하지 못하도록 장거리 미사일을 사용해 최전선 너머에 있는 비행장과 보급로 등을 파괴하는 게 목적이다. 전 영국군 탱크 사령관인 해미시 드 브레튼-고든은 “사거리 250㎞인 스톰 섀도를 사용하면 쿠르스크와 연결된 모든 철도 노선과 주요 도로, 100마일(160.9㎞) 이내의 모든 비행장을 파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에이태큼스는 사거리 300㎞가 넘는다.
우크라, 서울 면적 1.65배 러 영토 점령
지난 6일 러시아 본토로 진입한 우크라이나는 파죽지세로 러시아군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날 올렉산드르 시르시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화상 브리핑을 통해 “쿠르스크 지역의 1000㎢를 장악했다”고 젤렌스키에게 보고했다. 서울(605㎢)의 약 1.65배 면적이다.
앞서 러시아 쿠르스크의 알렉세이 수미르노프 주지사 대행은 푸틴에게 “2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마을 28곳이 우크라이나의 통제에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로이터는 “러시아의 주장은 우크라이나가 밝힌 성과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러시아가 주요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쿠르스크의 러시아 주민들은 우크라이나군의 급습에 소지품조차 챙기지 못한 채 황급히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 수드자의 한 주민은 “몇 시간만에 도시가 폐허가 됐다”며 “땅과 집을 잃었고 속옷 바람으로 도망쳐야 했다”고 텔레그램에 전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노인과 장애인들을 남겨두고 떠났다는 증언도 나왔다.
우크라이나는 쿠르스크와 인접한 벨고로드까지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벨고로드 주지사 비아체슬라프 글라드코프는 “적들이 국경에서 활동 중이다”고 경고하면서 접경 마을인 크라스나야 야루가 주민 1만1000명을 대피시켰다. 12일 기준 국경 지대를 떠나온 피란민은 최소 13만3000명이다.
푸틴은 본토 피습 일주일째인 이날 세번째 안보 회의를 주재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안보서기와 마라트 후스눌린 부총리, 알렉세이 듀민 대통령 보좌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사령관 등을 비롯해 국방 분야 고위급과 지역 주지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푸틴은 자필 메모를 읽으며 “국방부의 목표가 적들을 우리 영토에서 몰아내고, 국경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이어 우크라이나는 차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서방의 도움을 받아 도발한 것이라며, 이번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협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누그러뜨리지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푸틴 리더십, 시험대 올렸다" 평가
워싱턴포스트(WP)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러시아인의 삶 속에 끌어다 놓음으로써 푸틴의 리더십을 시험대에 올렸다고 평했다. 실제로 쿠르스크 주민들은 우크라이나군의 탱크가 들어올 때까지 대피 안내는커녕 전화 응답조차 없었다며 ‘정부 부재’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친크렘린 분석가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이번 공격으로 러시아군 지휘부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촉발됐으며, 러시아 국민들도 전쟁 종식을 간구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그간 자국민에서 심어 놓은 ‘푸틴의 무적 서사’에 구멍이 뚫리고 러시아인에게 전쟁 공포가 확산됐다는 것 자체가 성과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반면 서방 전문가들 사이에선 우크라이나의 선전에도 “이번 전략은 지나치게 위험한 행동이자 무모한 도박”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FT는 우크라이나가 이번 공격에서 성공하려면, 러시아가 최전선인 동부에서 병력 일부를 철수시켜 본토 방어에 투입해 우크라이나의 방어 압박이 완화되는 게 대전제라고 전했다. 이 경우 우크라이나는 최전방에서 병력을 추가로 빼내 본토 공격의 기세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전쟁연구소는 러시아가 쿠르스크에 최전방 병력 대신 예비군을 배치할 것으로 내다봤다. 오스트리아의 군사 분석가 프란츠-슈테판 가디 역시 “이 작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최전방에서 러시아에 밀리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근본적인 상황을 뒤집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러시아는 동부 전선에서 느리지만 여전히 진군 중이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본토보다 더 시급하게 병력을 투입할 곳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러시아는 본토 방어를 위해 대규모 활공 폭탄 등 화력을 총동원할 것이고, 이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내 점령지는 물론 자국의 주요 전선에 대한 방어 능력마저 손상될 만큼 많은 인력과 장비를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자존심에 금이 간 푸틴이 우크라이나 도시와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미사일 공격 등 맹렬한 보복을 승인할 가능성도 커졌다고 전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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