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억원 현상금 마다하고 김구 살린 한중 우정 (4)
자싱(嘉兴).
상하이에서 차량으로 항저우 방향으로 1시간 40분 정도 가면 저장성 자싱에 도착할 수 있다. 자싱은 한국 관광객들에게 다소 낯선 곳이다. 난후(南湖)가 그나마 알려진 호수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을 선언한 곳으로 유명하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망지로(望志路) 106호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됐다.
7월 30일 저녁, 한 낯선 사람이 회의장을 기웃거렸다. 경찰의 첩자로 생각하고 참석자들이 상하이 외곽에 있는 자싱으로 급히 피신했다. 다행히 한 참석자의 아내가 난후 주변의 소도시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유람선 한 척을 빌렸다.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이런 자싱을 찾은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더듬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김구를 포함한 이동녕‧박찬익‧엄항섭‧김의한 등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자싱으로 왔고 이곳에서 1932년 5월부터 1936년 2월까지 머물렀다. 실제로 거처한 기간은 2년 정도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자싱‧항저우‧난징 등으로 옮겨 다녔다.
이들이 여기에 온 것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데 혈안이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일단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더는 피치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피치 목사는 운전사로 위장한 뒤 김구를 서양인으로 화장시키고, 자신의 아내를 김구의 아내로 가장해 자동차로 피신했다. 김구 일행은 상하이 기차역에서 자싱을 향한 기차를 타고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싱에서 이들을 반겨준 사람은 추푸청(褚輔成, 1873~1948)이다. 추푸청은 자싱 출신으로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저장성 국민정부 주석을 역임했고 윤봉길 의거 당시는 상하이 법학원장‧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국민당 원로로 초기 중국 공산당 핵심 인물인 천두슈(陈独秀)가 국민당에 체포됐을 때 그를 변호한 경력이 있다. 이런 경력이 비록 국민당의 원로이지만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자싱에 만들어진 이유다. 그런 추푸청과 김구는 어떻게 연결됐을까?
김구가 자싱으로 피신한 데는 박찬익의 역할이 컸다. 그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을 맡는 등 임시정부 항일 외교의 최전선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대중국 외교교섭을 담당했으며 중국 국민당에 들어가 국제부 선전과에 근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국 국민당과 최접점의 외교통으로 활동했다.
박찬익은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중앙조직부에 근무하는 샤오정(蕭錚)을 만나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샤오정은 천궈푸(陳果夫) 부장에게 보고했다. 천궈푸는 샤오정에게 “추푸청 선생을 찾아가 김구 선생에게 도움을 제공해 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 박찬익과 추푸청은 이전부터 친한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이런 도움으로 김구 일행은 자싱에 올 수 있었다. 김구는 추푸청의 수양아들 천둥성(陳桐生)의 별채인 자싱 매만가 76호에 머물렀다. 지금은 건물 입구에 ‘김구피난처 金九避难处’로 한글과 중국어로 함께 적힌 표지판이 있다. 이곳은 2005년 저장성의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고 2006년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2층 목조주택이며 침실로 사용한 2층 방 한쪽 구석에는 긴급할 경우 사용할 수 있도록 비상 탈출구가 있었다. 비상 탈출구를 통하면 배 한 척이 나오는 데 위험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졌다.
김구는 당시 중국 광둥 출신의 상인 ‘장진구(張震球)’라는 가명을 쓰며 다녔다. 그러다가 1933년 여름 외출 중 신분이 광둥인이 아닌 것이 알려져 중국 경찰에 붙잡혔다. 다행히 천둥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 이후 천둥성은 집안일을 하던 주아이바오(朱爱宝)에게 뱃사공을 하며 김구의 안전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김구는 낮에 주아이바오와 함께 배를 타고 나갔다가 어둑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힘든 생활을 했다.
김구의 피난 시기를 배경으로 주아이바오와 김구와의 관계를 조명한 ‘선월(船月)’이라는 소설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와 중국의 평범한 뱃사공을 통해 항일전선에 함께 연대한 한‧중 간의 우의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샤녠성(夏辇生)으로 윤봉길 의사의 전기 『회귀천당(回歸天堂)』도 썼다.
자싱으로 온 이동녕‧엄항섭‧김의한‧박찬익 등은 김구피난처에서 200m 떨어진 일휘교 17호에 머물렀다. 추푸청이 김구의 안전을 배려한 것이다. 김구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추푸청‧박찬익‧엄항섭뿐이었다. 일휘교 17호에 들어서면 1층 전시실이 나온다. 그곳에 김구를 비롯해 이동녕‧엄항섭‧김의한‧박찬익의 가족들과 자싱 피난 생활에 큰 도움을 준 추푸청 가족사진이 전시돼 있다.
그 사진을 쳐다보면 잠시 뭉클해진다. 추푸청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일제의 압박을 피해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김구에 걸린 현상금은 무려 60만 위안. 현재 한화로 환산하면 200억원 정도. 천궈푸의 부탁이었지만 거절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발각되면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추푸청 가족은 200억원에 눈이 멀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김구피난처 옆에 있는 추푸청사료진열실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진열실 2층에 가면 추푸청의 밀납 인형 뒤에 글귀가 있다. 추푸청이 고대 한자 서체인 전서(篆書)로 쓴 글이다. 그것을 읽으면 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여유경동망불길(汝唯敬動芒不吉)
네가 오직 공경히 행동하면 길하지 않은 일이 없고
약유유용현기능(若有猷用懸其能)
만약 꾀를 부리려 한다면 능력이 헛되이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임정 요인들을 도왔던 추푸청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감사의 마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 가면 ‘독립운동을 도와준 외국인들’이라는 코너가 있다. 12명의 사진이 있는데 장제스‧쑹메이링‧저우언라이 등이 있다. 그들과 함께 천궈푸‧추푸청‧피치 등도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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