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02세 독립지사 "日탄압 생생하나, 적으로 둘 필요없다"
" “당연히 내가 대통령께 찾아봬야 하는데…. 먼 곳까지 오게 해서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1921년 11월생, 올해 102세가 된 이하전 독립지사는 감사패와 태극기, 새 한복을 받아들고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제의 탄압, 오랜 타향 살이의 흔적이 느껴지는 듯한 주름진 손은 고운 한복을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어느새 깊이 팬 두 눈가엔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광복 79주년을 앞둔 현재 독립 훈장을 서훈 받은 애국지사 중 생존자는 6명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1년간 3명이 서거했다. 중앙일보는 6명 중 최고령자인 이 지사를 미국 새크라멘토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지난해 일본에서 오성규 지사가 영구 귀국한 뒤 유일하게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독립지사다.
“이제야 영웅을 찾아뵙습니다”
지난 9일(현지시간) 현관문을 두드리자 이 지사가 보행기에 의지한 채 아들 부부와 함께 문 앞으로 나왔다. 주미대사관 이길현 보훈관이 “대한민국이 이제야 영웅을 찾아뵙습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하자, 이 지사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동행한 빙그레 미주법인 관계자로부터 받은 김혜순 장인의 한복을 갈아입고는 “정말 한국 사람이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 광복절에 맞춰 생존해 있는 독립지사 6명 모두에게 새 한복을 전달한다고 전하자 이 지사는 “정말 잘한 일”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보훈부와 빙그레는 아울러 유관순 열사 등 옥중에서 순국해 죄수복 차림으로 남아 있는 87명 독립지사의 사진을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바꾸고, 후손들에게 사진 속 한복을 전달할 계획이다.
17세 ‘까까머리’ 독립투사
이 지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가 시작되자 까까머리 소년 시절의 사진이 담긴 앨범을 꺼냈다. 85년 전 17세 시절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나이 어린 동지들의 모습을 보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Q :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게 무섭지 않았나.
A : “왜 겁이 나지 않았겠나. 어린 학생이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재학하던)평양 숭인상업학교에는 조선총독부가 심어놓은 ‘간첩’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정말 이래서야 되겠냐’며 동지들과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었다. 순수한 애국심이었다. 그때는 큰돈이었던 1달러, 2달러를 만들어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Q : 결국 일본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A : “평양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중에도 활동을 했다. 그런데 총독부가 함석헌 선생(1901~1989)을 조사하는데 자택에서 우리 결사체가 노출되면서 일본에서 체포돼 한국으로 압송됐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반을 구형했다. 미결 기간까지 더해 3년 반동안 감옥에 있었고, 1년간 매일 고문을 당했다.”
함석헌·안창호 선생 영향…“이기려면 공부해야”
평안북도 용천 출신 독립운동가인 신천(信天) 함석헌 선생은 해방 이후 반공 시위의 배후로 몰려 북한 당국에 체포됐다가 월남했다. 한국에선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수 차례 옥살이를 했다.
신천과 함께 이 지사의 정신적 스승은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 선생이다. 흥사단 단원이었던 이 지사의 뜻도 도산의 ‘실력양성론’과 닿아있다.
Q :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는데.
A : “참 긴 얘기다. 말년(1935년)에 도산 선생이 집 근처 대보산(송태산장)에 계실 때가 있었다. 순사들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대보산 앞길로는 절대 안 다니고 뒷길로 돌아서 다녔다. 내가 미국에 와서도 흥사단 위원장을 했다.”
분단된 조국…미군의 한국어 교수
이 지사는 광복 이후 남과 북이 갈라지자 월남했다. 그리고 도산의 길을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배를 탔다.
Q : 광복 소식을 듣고 기분이 어땠나.
A : “기뻤지. 그런데 남과 북으로 분단돼 버렸어. 북에는 중국과 소련의 공산당 사상이 들어오고. 아버지와 밤중에 임진강을 건넜다. 난 공산당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기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희학교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행 배를 탔다. 5달러가 전부여서 매일 접시를 닦으며 공부했다.”
Q : 미국에서 한국전쟁 소식을 들었을텐데.
A : “전쟁이 터지면서 미군들이 한국에 파병됐다. 나는 몬트레이 미 육군 언어학교에서 한국어과 교수가 돼서 한국전 참전군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 일을 30년 넘게 했다.”
북의 가족·이념 논란에 ‘손사래’
이 지사에게 독립기념관장 임명, 광복절 기념식 보이콧 논란 등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이 지사는 연신 “전혀, 전혀. 나는 그런 것은 몰라”라고만 하며 손사래를 쳤다. 북한에 남은 가족에 대해서도 “딸(여동생) 둘이 있었는데 살아있든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공산당이 싫다”고만 답했다.
지사의 가족들은 “평소 가족을 그렇게 그리워하면서도 과거 암울한 시대를 거치면서 혹시라도 북한에 있는 가족이 자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까봐 가족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며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도 할 말씀이 있겠지만, 여러 경험을 통해서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과도 이웃으로 지낼 때”
일제의 압제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 지사는, 그러나 이젠 일본과는 이웃으로 지내야 한다고 했다.
Q : 최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이뤄지고 있는데.
A : “내가 일본 사람들에게 감옥살이를 해봐서 그들의 정신을 잘 안다.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람도 알게 됐다. 정치 상황은 모르겠지만, 일본과 계속 적(敵)으로 있을 필요가 없다. 이제 이웃으로 지내면 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들보다) 머리가 좋잖아. 그러면 이웃으로 지낼 수 있다.”
Q :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 “아무래도 공부를 해야 한다. (나는)돈이 없어 고학을 해야 했다. 공부를 했지만, 결국 박사를 하지 못하고 (박사학위를 못하고)석사까지밖에 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국립묘지 안장 약속에 나온 ‘나의 살던 고향’
이 지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갖췄으나 미처 공식적으로 의사를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보훈부는 이 지사를 포함, 생존 독립유공자 6명을 위한 국립묘지 공간을 확보해뒀다.
Q : 돌아가신 뒤에라도 한국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A : “감사하게 나를 유공자로 해줬다. 한국에 유공자들을 모시는 ‘어딘가’가 있다고 하던데, 만약 내가 거기에 갈 수 있다면 나로서는 정말….”
이 지사의 의사를 확인한 보훈관은 “지사님의 뜻에 따라 국립묘지로 잘 모시겠다”고 답했다. 이 지사는 “대통령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달라”며 몇 번을 당부했다. 아들 부부는 “7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혹시 국립묘지 안장이 가능할지 몰라 지금껏 봉안만 하고 있었는데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이 지사는 “기분이 좋아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자청했다. 그가 나지막히 부른 노래는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로 끝나는 ‘고향의 봄’이었다. 그리고는 “언제든 다시 찾아와달라”며 보행기에 기대 현관까지 나와 고국에서 온 손님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새크라멘토=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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