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팩으로 겨우 버티는 12살 딸…밤낮 없는 폭염에 서러운 이들

정종훈, 문상혁 2024. 8. 1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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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잊기 위해 얼린 아이스팩을 목에 붙이고 자는 12살 송모양. 저소득 가구인 이 집엔 에어컨은 없고 선풍기만 있다. 사진 송모씨

올여름 서울 구로구 송모(54)씨 집에선 '찬물 샤워'가 주된 일과다. 기초생활보장 대상인 송씨 부부와 미성년 자녀 4명이 오래된 다가구 주택에 모여 사는데, 선풍기 4대에 의지한다. 12살 막내딸은 택배용 아이스팩이나 물을 넣은 페트병을 얼려서 수건에 감은 뒤 얼굴이나 목에 대고서야 겨우 잠이 든다. 송씨는 "매년 여름마다 비슷한데, 올해는 열대야도 길고 유독 덥다. 오히려 집안보다 밖이 더 시원할 정도"라면서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전기료는 별로 안 나온다. 찬물 샤워로 버티니 오히려 물값만 월 10만원씩 나와서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밤낮으로 강한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지면서 기초수급자·고령자 등 취약계층은 유독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에어컨은 언감생심이니 푹푹 찌는 집안에서 어떻게든 버티면서 눈을 붙이거나, 더위를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 조금이나마 돈을 벌거나 생활비를 아끼려다 녹초가 되는 식이다. 에어컨 '풀가동'에 전력 수요가 역대 최대치를 찍고, 전기료가 많이 나올까 걱정하는 바깥 풍경은 먼 나라 이야기다. 날씨가 더워질수록 '기후 격차'가 더 심해지는 셈이다.
7일 서울의 한 건물에 에어컨 실외기들이 작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소득층 에어컨 보급률, 일반 가구의 5분의 1


주거 빈곤에 놓인 아동·청소년 가정은 매일 밤 고역이다. 경기도 내 노후한 농가에 사는 장모(42)씨 가족은 여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엄마 장씨 등 부모 건강이 안 좋아 기초수급과 지역 복지관에서 일하는 수입으로 근근이 버틴다. 초·중·고에 다니는 세 자매는 그나마 시원한 거실에 모여 열대야를 보낸다. 장씨는 "에어컨은 고사하고 동네 이웃이 달아준 중고 냉풍기에 한숨을 돌리는 상황"이라면서 "하도 더우니 아이들도 예전보다 잠이 늦게 든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는 최근 전국적인 냉방 증가 등으로 역대 여름철 최대 전력 수요(93.8GW·8월 5일)를 기록한 것과 대비된다.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전국의 에어컨 보유 대수는 가구당 0.97대(2019년 기준)다. 하지만 서울연구원 조사 결과 저소득층의 에어컨 보급률은 가구당 0.18대(2019년·서울 거주 기준)에 그쳤다. 송씨는 "아이들이 '엄마, 에어컨 달면 안 되냐'고 물어보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원래는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요즘은 (에어컨 있는) 친구 집에서 '놀다가 자고 와'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 8일 오전, 서울 탑골공원 근처 무료급식소 앞에 긴 줄을 늘어선 노인들. 폭염에도 새벽부터 와서 몇시간씩 기다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상혁 기자
8일 오전 서울 탑골공원 근처 무료급식소에서 나눠준 번호표를 보여주는 노인. 앞에 있는 대기자 수가 84명으로 나온다. 문상혁 기자


새벽부터 무료급식 줄 서는 노인들 "더워도 견뎌야"


저소득 노인들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밖으로 나선다. 8일 오전 서울 탑골공원 인근 무료급식소 앞엔 땡볕에도 불구하고 100m 넘는 대기 줄이 늘어섰다. 주로 60~80대인 노인 약 500명이 정오께 나눠주는 도시락을 받기 위해서다.
새벽 6시부터 줄을 섰다는 서모(81)씨는 "일찍 오지 않으면 못 먹는 경우도 있어서 빨리 왔다. 더워서 힘들지만 견딜 수밖에 없다"면서 "노인들은 따로 갈 데가 없으니 여기 와서 밥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급식소 관계자는 "새벽 4시부터 기다리는 분도 있다. 순서대로 번호표를 나눠주는데 더운 날 짜증이 많아져서 그런지 노인들 간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전했다.
더운 날씨에도 폐지를 주운 노인이 고물상에 들어가는 모습. 문상혁 기자


딸 만류에도 폐지 주워…쪽방촌은 "앞방 사람 숨져"


폐지 줍는 노인에게도 요즘 같은 폭염은 고비로 꼽힌다. 서울 종로구의 한 고물상 사장은 "한창 많이 올 때는 40~50명 정도인데, 최근엔 20명도 안 될 정도로 줄었다"면서 "아무래도 더운 날씨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모(76)씨는 비지땀을 흘리면서 9일 서울 영등포의 한 고물상에 폐지를 모아왔다. 그는 "새벽 6시부터 돌면서 하루 만원 정도 번다. 오늘 아침엔 딸이 '더우니 나가지 말라'고 붙잡았지만, 자식들 형편도 어려우니 손 벌리기 싫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날이 너무 더우니 어지러울 때도 잦고 허리 삐끗할 때도 있지만, 다 감수하고 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령자가 많은 쪽방촌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폭염 경보가 내려진 이 날 서울 영등포 쪽방촌은 집안에 머무르기 어려울 정도로 열기가 치솟았다. 무더위 쉼터나 냉방이 잘 되는 근처 쇼핑몰이 있어도 이곳 주민이 가긴 어려운 편이다. 3년 동안 살았다는 김모(69)씨는 "요즘은 안에 있으면 찜통이나 다름없다. 특히 창문 없는 방은 못 참을 정도"라면서 "다들 밤에 수시로 깨서 밖에 잠깐 나왔다 들어가는 식이다. 앞방에 살던 사람은 엊그제 숨졌는데 더위 때문에 그런 거 같다"고 말했다. 더위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협하는 셈이다.
9일 저소득층이 밀집한 서울 영등포 쪽방촌 곳곳은 폭염에 따른 열기를 줄이기 위해 문이 열려 있었다. 문상혁 기자


더 벌어지는 기후 격차…"주거빈곤 조사 등 필요"


더 길어지고 강해진 폭염 속에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취약계층은 늘고 있다. 한국사회보장정보원에 따르면 하절기 '에너지 바우처' 온라인 신청 건수는 올 5~7월 5787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51% 급증했다. 에너지 바우처는 노인·장애인·한부모 기초수급가구 등의 냉방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하절기 전기료에서 바우처 지원액(1인 4만700원~4인 이상 10만2000원)만큼 자동 차감해주는 제도다.

일상화된 기후변화 속에 폭염·혹한에 따른 계층 간 기후 격차가 점차 벌어질 수 있는 만큼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주거 빈곤층이 많은 쪽방촌 등엔 폭염·한파를 적절히 견디게 해주는 장치가 거의 마련돼 있지 않다. 냉난방이 잘 되는 쉼터 등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미경 초록우산 복지사업본부장은 "정부는 에너지 바우처 지원을 확대하고, 민간 차원에선 냉·난방 물품 지원과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이뤄지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장기적으론 반지하·옥탑방 같은 열악한 주거 빈곤 환경에 놓인 아동 가정 등의 실태조사를 거쳐 맞춤형 지원에 나서야 기후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정종훈ㆍ문상혁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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