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당신에겐 견뎌내고 싶은 고통이 있습니까
고통이란 무엇인가
‘등신불’의 주인공은 일제 시기에 학병으로 끌려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만, 가까스로 탈출해서 정원사(淨願寺)라는 절에 숨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 모양 크기의 금불상을 접하게 되는데, 그 금불상이 원래 다름 아닌 사람 시체였던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된다. 만적 스님이란 분이 스스로 불길 속에 앉아있음으로써(소신공양·燒身供養) 이 세상을 떠났고, 그 불탄 몸에 그대로 금물을 부어서 만든 불상이 바로 정원사 금불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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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고통에도 능동적인 존재
의미 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감내
한국 사회 다음 단계 나아가려면
고통 감수할 만한 새 비전이 필요
」
소신공양 ‘등신불’의 충격
소설 ‘등신불’에는 만적 스님이 왜 소신공양을 하게 되었는지, 소신공양을 하게 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주인공은 어떤 감상에 휩싸이게 되는지에 대해 부연하고 있지만, 내 어린 마음에 충격이었던 것은 그러한 등신불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였다. 너무 뜨겁지 않을까. 달아오른 라면 냄비에는 비할 수 없는 그 엄청난 뜨거움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인생이 고통이라는데, 왜 그처럼 지독한 고통을 자청한단 말인가. 소신공양을 통한 등신불이란 거짓말이 아닐까.
그러나 자기 몸을 스스로 태우는 소신공양은 실제로 존재했다. 1963년 5월 29일 베트남의 틱꽝득 스님이 응오딘지엠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취지에서 소신공양을 감행한 일은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저항정신을 앞세운 미국의 밴드 레이지어겐스트더머신이 1집 앨범 재킷에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 사진을 실었기에 그 이미지는 더욱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에서도 1998년 6월 27일에 태고종 충담 스님이 소신공양했다고 알려져 있고, 2010년 5월 31일 조계종 문수 스님이 사회적 메시지가 가득한 유서를 남기고 소신공양했을 때도 관련 신문 기사를 접한 기억이 있다.
이러한 소신공양의 사례에서 한층 놀라웠던 것은 그에 임한 스님들이 대개 자세를 크게 흩뜨리지 않고 결가부좌 상태를 유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내 질문은 커져만 갔다. 그들은 그 심한 고통을 대체 어떻게 견뎠단 말인가. 2007년 심리신체의학 저널에 실렸던 두 건설노동자 사례 보고를 접하고서 이 질문은 바뀌었다. “그들은 그 심한 고통을 대체 어떻게 견뎠단 말인가”가 아니라 “그들은 어떻게 고통을 심하게 느끼지 않을 수 있었나”로.
고통의 뇌심리학
그 두 노동자 중 한 사람인 29세 청년은 일하다가 그만 잘못하여 7인치나 되는 못 위로 뛰어내리게 되었다. 그 못은 장화를 관통하여 반대쪽으로 비죽 튀어나왔고, 그 청년은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러댔다. 곧바로 응급실에 실려 가 치료를 받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정작 장화를 벗겨보니, 아무런 핏자국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대못은 발가락 사이의 빈틈을 지나가서 정작 발에 상처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기적처럼 운이 좋았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느낀 강렬한 고통은 진짜였다. 상처 없이 고통을 느끼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연구에 따르면, 과거의 경험과 위험한 작업환경과 동료들의 심각한 표정 등이 일조한 결과, 그의 뇌가 그만한 고통을 느끼도록 ‘결정’한 결과였다.
콜로라도에 있던 다른 한명의 건설 노동자는 네일건(nail gun)을 가지고 못을 박던 와중에 못이 그만 반대방향으로 발사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순간 그는 못 하나가 그를 지나쳐 날아가 건너편 벽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 그는 두통과 치통을 경미하게 느끼기는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6일 동안이나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6일 만에 그 가벼운 치통을 처리하기 위해 치과에 들르자, 치과의사는 검진 결과 4인치짜리 못이 그의 얼굴에 박혀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어떻게 그는 못이 자기 얼굴에 박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었을까. 얼굴에 못이 박혔는데 어떻게 심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못 하나가 스쳐 날아가 건너편 벽에 박혔다는 시각 정보를 접수한 그의 뇌는, 못이 그의 얼굴에 박히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다른 못이 얼굴에 박혔다는 사실을 모르고) 대단한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고통 관련 심리 기제를 연구하는 학자인 레이철 조프니스는 이 두 사례를 통해 고통과 상처는 별개의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에 따르면 특히 만성적인 고통은 그저 개인 신체의 증상에 그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 해당 부위의 즉각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뇌의 판단을 거친 복합적인 경험이다. 즉 뇌는 매번 여러 관련 정보를 수합하여 이번에는 어느 정도 고통을 느낄지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뇌의 판단에는 자신의 정체성, 환경 등 사회적 맥락까지 깊이 연루되어 있다.
문명사는 고통을 다루어온 역사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우리가 고통의 수동적인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인 주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통에 관련된 뇌의 판단과정을 깊이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으면 어쩌면 우리는 고통의 크기를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고통을 좀 더 잘 다루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신공양을 해낸 스님들은 어쩌면 자기 뇌를 그렇게 통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닐까. 그리하여 고통을 참기보다는 고통을 덜 느끼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소신공양뿐 아니라 역사상 존재해 온 순교 행위를 좀 더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어쩌면 고통에 능동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나같이 한심한 사람도 뜨거운 라면 냄비를 잘 옮기게 될지 모른다.
실로 인류 문명사의 상당 부분은 고통을 다루어온 역사이기도 하다. 로마의 영웅들은 영웅됨을 드러내기 위해 고통을 기꺼이 감내했고, 중세 수도원 사람들은 속죄를 위해 고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까지 했다. 고통의 회피와 쾌락의 추구를 긍정했던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이 어떻게 유럽문화 속에서 억압되었는지를 추적한 영문학자 스티븐 그린블랫은 이렇게 말한다. “서구 역사에 나타난 엄청난 문화적 전환의 하나는 바로 이것, 고통에의 추구가 쾌락에의 추구를 누르고 승리한 것이다.” 이것이 어디 서양만의 일일까. 고통의 회피와 쾌락의 추구를 대놓고 설파한 고대 중국의 양주(楊朱) 사상은 오랫동안 ‘이단시’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인간이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좇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지 않은가.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 않는가. 그러나 인간 문명의 상당 부분은 쾌락을 절제하고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발달한 것 역시 사실이다. 달면 무작정 삼키고 쓰면 무작정 뱉는 행동에 대한 경고를 통해 문명이 발전했다. 실로 고통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존재이지만, 고통의 감수를 통해 보다 나은 상태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고통은 양날의 칼이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위험한 친구다.
‘의미 있는 고통’을 감수하는 사회
고통이란 친구가 위험하다고 해서 쾌락만 벗하면 결국 권태라는 또 다른 위험한 친구가 찾아온다. 쾌락은 지속되지 않으며, 이완은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휴식은 권태로워지기 시작한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사람들은 마침내 휴식하기를 멈추고 일하기를 원하며, 이완하기를 그치고 긴장하기를 원하며, 권태로운 쾌락에서 벗어나 고통받기를 원한다. 마치 달리기 운동을 결심한 사람처럼. 달리기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운동으로서 달리기는 결국 몸에 보다 나은 상태를 선물할 것이며, 그러기에 사람들은 달리기의 고통을 감수한다.
불을 잘 다루어야 익힌 음식을 먹을 수 있듯이, 고통이란 불을 잘 다루어야 보다 나은 문명을 누릴 수 있다. 남는 질문은 과연 어떤 고통, 어떤 긴장, 어떤 노동이냐는 것이다.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싫어한다. 고통이 무의미할 때 그 고통은 한층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의미 있는 고통이라면 더 큰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입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단체에 더 충성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사회과학자 욘 엘스터는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시시각각으로 분해되어가는 오늘날, 고통스럽더라도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하고 싶어지는 새로운 분투, 그 분투를 독려할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 분투 속에서 한국은 기꺼이 살고 싶은 곳으로 변할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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