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안 하는 국회… 위헌·헌법불합치에도 법률 개정 ‘미적’

이종선,정우진 2024. 8. 12. 19: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에도 개정 안 된 법률 43건
“지연된 입법, 정의롭기 어려워”
22대 국회. 연합뉴스

헌법재판소는 이명박정부 시절인 2009년 9월 야간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제10조 및 23조1호)이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해당 조항은 ‘누구든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며 미리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야간 옥외집회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집회 주최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돼 있었다.

이 조항은 결국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단을 받았음에도 헌재가 개정을 권고한 시한(2010년 6월 말)이 14년이나 지난 지금도 개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같은 법률의 대통령 관저와 국회의장 공관 100m 이내 집회 금지 조항도 2022년 12월과 지난해 3월 차례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후 국회에서 단 한 차례 논의도 없었다. 헌재는 지난 5월 말까지 법률 개정을 권고했었다.

‘일하는 국회’를 내세운 22대 국회 들어서도 헌재로부터 위헌 및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법률에 대한 대체 입법에 미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 국회 사무처 법제실 집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헌재의 위헌,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개정되지 않은 법률은 총 43건에 이른다. 하지만 국민일보가 12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22대 국회 개원 이후 이를 법률에 대한 대체 발의는 18건에 불과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법 조항은 바로 무효가 되지만,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으면 법이 개정될 때까지는 효력이 유지된다. 헌재는 이런 경우 국회에 일정 시한을 정해 개정을 권고하지만, 국회의 법 개정에 대해 강제성이 없다 보니 헌재로부터 헌법 위배 판단을 받고도 개정되지 않은 사례가 수두룩하다. 국회의 임무 방기 속에 곳곳에서 입법 사각지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낙태를 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269조와 270조1항)이다. 헌재는 이 조항들에 대해 2019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이듬해 연말까지 법 개정을 권고했지만, 국회는 아직도 개정안을 내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최근 한 여성이 임신 36주 차에 낙태 수술을 받은 사실을 공개해 사회적인 파문이 일기도 했다. 해당 여성에 대한 낙태죄 처벌 규정이 없다 보니 경찰도 일단 여성을 영아 살인 혐의로 입건할 수밖에 없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이 재판 지연으로 문제가 되듯 국회 역시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입법 지연’을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지연된 입법은 정의로운 입법이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권고 개정시한 넘긴 법안 9건…기약 없는 입법

현재까지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법률 중 이미 헌재의 권고 개정시한을 넘긴 법안은 9건에 달한다.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뿐 아니라 보안관찰처분 대상자에 대해 무기한으로 변동신고 의무를 규정한 보안관찰법 조항(6조2항, 27조2항) 역시 2021년 6월 헌재로부터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개정 권고시한인 지난해 6월까지 보완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다. 22대 국회에서도 해당 조항에 대한 개정안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국민의 참정권과 관련된 입법 사각지대가 수년간 방치된 사례도 있다. 재외선거인의 국민투표권을 주민등록이 되거나 국내에 거소신고가 된 투표권자로 제한하는 국민투표법(14조1항)에 대해서도 헌재는 2014년 7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이 조항은 개정이 안 됐다. 22대 국회에서는 그나마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주민등록이 되지 않은 투표권자도 재외투표인 등록신청을 하면 투표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헌재 결정에 따라 법 개정이 필요한 법률의 상당수는 법제사법위원회와 행정안전위원회 소관인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대상 법률 중 법사위 소관 법률이 16건, 행안위 소관 법률은 13건으로 보건복지위(6건), 정무위(2건), 운영위‧교육위‧외교통일위‧국방위‧문화체육관광위‧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각각 1건) 등 다른 상임위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22대 국회에서 법사위와 행안위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 ‘전국민 25만원 지원법’(민생회복지원금지급 특별조치법) 등 정쟁 성격이 짙은 사안들이 집중되다 보니 다른 법안들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대체 입법이 지연되는 주요 이유는 의원들의 ‘여론 눈치 보기’ 탓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당의 한 의원실 관계자는 “헌재에서도 꾸준히 헌법불합치 법안들에 대한 보완 입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의원들도 현황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굳이 내가 총대 메고 나서야 하냐’ 하는 기류가 있다”고 전했다. 특히 성범죄 관련 조항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기피 정서가 강하다.

헌재는 2022년 11월과 지난해 6월 아동‧청소년 음란물 소지죄로 형이 확정된 자를 각각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의 임용 결격사유로 규정한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 조항에 대해 헌법에 보장된 공무담임권(헌법25조)을 침해했다고 결정하면서 국회에 올해 5월 말까지 개정할 것을 권고했지만, 여야 의원들 누구도 법 개정안을 내지 않았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헌법상 공무담임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 개정안을 낸다면 ‘성범죄자들을 공무원 만들어주려 하느냐’ 하는 비난을 받을 텐데 어느 의원이 그걸 감당하겠냐”고 반문했다.

이종선 정우진 기자 remember@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