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로 함께 살래? 싸우다 같이 죽을래?
[육성철 기자]
▲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의 최신작 <숙론>. |
ⓒ 김영사 |
하나의 색깔로는 세상을 표현하기 어렵다
동물 연구만으로도 바쁜 저자가 무려 9년 동안 '숙론'을 집필한 배경은 총체적 시대 위기론이다. 여기엔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사회적 갈등과 인류 문명의 목줄을 쥔 기후변화까지 포섭된다. 어느덧 고희에 이른 저자의 눈에 비친 '위기 중의 위기'는 교육 시스템이다. 나라 안팎의 고명한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대한민국은 교육 때문에 흥했고, 이제 교육 때문에 망할 지경이다.
오래 전 TV 다큐에서 서울대 학생과 유럽 대학생을 심층 면접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시험 볼 때 정답을 맞추었던 문제와 풀지 못했던 문제 중 어떤 문제가 나오기를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두 집단의 의견이 갈렸다. 서울대 학생들은 "한번 풀어본 문제를 만나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고, 유럽의 대학생들은 "새로운 문제를 만나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이 본격적인 학문의 단계에 진입했을 때, 어느 쪽이 더 창의적일지는 자명해 보인다.
소설가 김훈 선생이 일갈했듯이 대한민국 입시제도는 "내 새끼 지상주의"로 요약된다. 조기교육과 사교육 시장을 관통하는 일관된 공식은 승자독식 줄 세우기 경쟁이다. 0.01점 차이로 진로가 결정되고, 단 하루의 결과를 평생의 무기로 쓴다. 그러므로 수험장 앞에서 "모두 시험 잘 보세요"라는 덕담은 "모두 부자 되세요"만큼이나 허무맹랑한 빈말이다.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극강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과연 누가어떻게 숙론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단 말인가?
팬덤이 여론을 지배하는 광장에서 극단의 주장은 세력화에 유리하다. 말이 강하고 선명할수록 상대의 주장을 구석으로 몰아 제압하기 쉽다. 이런 막장 말싸움의 끝자락은 대체로 공허하다. 이기고도 뭘 얻었는지 분별하기 어렵다. 제아무리 정교한 논리를 갖추었더라도 하나의 색깔로는 세상을 표현하기 어렵다. 그것은 0과 1 사이에 무수히 많은 숫자가 놓이는 이치와 같다.
▲ 최재천 진화생물학자는 '모든 환경 문제는 궁극적으로 인구 문제'라고 밝혔다. |
ⓒ Youtube |
저자는 현실의 막막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댄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체험한 다양한 '열린 대화'의 기술을 소개하며 우리 사회에서도 숙론이 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인문학자이기 이전에 생물학자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 썼듯이 "자연이란 손잡은 생물이 미처 손잡지 못한 것들을 물리치고 사는 곳"이라고 믿는다. 사람 사는 세상도 강물이나 공기처럼 그렇게 흘러갈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숙론의 성공 사례로 '제돌이 야생방류 시민위원회'를 꼽는다. 도무지 말이 섞일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면서 생명의 바다로 나아갔던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여기엔 저자가 위원장으로서 이 역사적 과업에 뼈를 갈아 넣은 인내심과 책임감이 녹아 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하나의 조직이 생기를 유지하려면 누군가 영혼을 담아야 한다. "돌고래에겐 바다보다 수족관이 더 안전하다"는 주장에 맞선 저자의 사자후가 지금까지도 동물권 보호의 명언으로 남아 있다.
"만일 당신이 돌고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다?(중략) 저는 야생으로 돌아간 다음 날 죽더라도 나갈 겁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를 선택할 겁니다. 이 세상에 대가 없이 얻어지는 자유는 없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저자가 제시한 토론의 ABC에 한 번쯤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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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후반부엔 저자가 직접 겪은 숙론의 '비기'가 적혀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기술이지만 일상에서 흔히 무시하는 디테일이다. 적정 환경 조성, 경청과수용, 치밀하고 유연한 준비, 합의된 토론 규칙, 적대적 발언 삼가, 충분한 답변 시간 부여, 적절한 연기와 가장 등이 그것이다.
물론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실천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기본을 잘 챙기지 못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 날선 발언에 상처를 입었거나 과잉 행동으로 우군을 잃었던 경험이 있다면, 이제라도 저자가 제시한 토론의 ABC에 한 번쯤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육성철은 월간 <신동아>에서 근무했던 전직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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