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리자 원전 냉각탑 화재…러 "핵테러" 우크라 "러 자작극"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원전의 안전성 문제로 번지고 있다. 러시아 본토를 급습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쿠르스크 원전을 향해 진격 중인 가운데,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원전에선 화재가 발생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양국에 핵 시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군사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유럽 최대 원전 단지 자포리자 불길
1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BBC 방송, 키이우인디펜던트 등은 러시아가 점령한 유럽 최대 원전 단지인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냉각탑 중 하나가 손상됐다고 전했다. 다만 러시아 당국자는 냉각탑에 난 화재가 원전 안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폭발 등의 가능성은 없다.
이번 불로 방사능은 누출되지 않았다. 자포리자 원전 6기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9월 냉온정지 상태로 전환돼 가동이 중단됐다.
양국은 화재의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며 ‘네탓 공방’에 열을 올렸다.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사톰은 성명을 통해 “11일 오후 8시20분과 32분께 자포리자 원전의 2개 냉각탑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의 공격형 드론에 직격돼 내부 구조에 화재가 발생했다”며 이번 화재 원인이 우크라이나가 저지른 ‘핵 테러’라고 주장했다.
반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군이 자포리자 원전에 불을 질렀다면서 “러시아는 필요한 경우 자포리자 원전을 파괴해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핵 재난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자포리자 원전이 있는 에네르호다르 인근 우크라이나 당국자는 러시아군이 냉각탑 안에서 오토바이용 타이어를 태워 화재를 꾸며냈다고 주장했다.
이번 화재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로 진입해 엿새째 지상전을 이어가는 가운데 발생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국경에서 각각 25㎞, 30㎞ 떨어진 톨피노와 옵스치 콜로데즈에서 우크라이나군 기동대의 돌파 시도를 차단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본토 내 최대 30㎞ 지점까지 진입한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우크라이나군도 쿠르스크의 여러 마을을 점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내부에서 약 3㎞ 떨어진 마을 게보에서는 우크라이나군이 관공서에서 러시아 국기를 제거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공개됐다. 스베르들리코보와 포로즈의 관공서도 점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디언 등 외신은 우크라이나군이 대규모 원전이 위치한 쿠르스크주의 쿠르차토프를 향해 진군 중이라고 전했다.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옵스치 콜로데즈에서 쿠르차토프 원전까지는 50㎞ 이내다.
BBC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에 패퇴 중인 러시아군은 쿠르차토프 원전 근처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 원전 수성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쿠르차토프 원전 주변으로 전투가 확대되고 있다면서 양국에 “최대의 자제력을 발휘하라”고 촉구했다.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은 12일 성명을 내고 "드론 공격이 있었던 냉각탑 주변엔 방사성 물질이 없었고, 이에 따라 방사선 수치가 상승할 위험도 없다는 게 현장 전문가들의 판단"이라며 원전에 대한 공격 중단을 촉구했다. 자포리자 원전 대변인 예브게니야 야시나는 이날 스푸트니크 통신에 "냉각탑이 내부에서 불에 탔고 복구 시간은 상황 평가 결과에 달렸다"고 밝혔다. 다만, 러시아가 임명한 자포리자 수장 예브게니 발리츠키는 텔레그램을 통해 "원전 화재로 자포로제, 특히 에네르호다르 지역 주민들이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러시아 측 민간인 피해 급증
교전이 격화되면서 러시아 측 민간인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알렉세이 스미르노프 주지사 대행은 12명이 숨지고 121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또 현재까지 12만1000명이 대피했다고 덧붙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2일 "러시아 영토에서 적을 쫓아내는 게 러시아 국방부의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고 BBC가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지역 기습 공격이 며칠간 이어지는 가운데 회의를 소집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의 기습 공격은 협상에서 좀더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BBC는 스미르노프 주지사 대행이 이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영토 안 12㎞까지 진입했으며 28개 마을이 적의 통제에 놓이는 등 상황이 어렵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마리아 자하로바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평화로운 국민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올렉시 곤차렌코는 “(러시아 본토 진입) 작전을 환영하며, 이런 공격이 100번의 평화 정상회담보다 평화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가 전쟁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자국 영토에서 반격해야 할 때, 자국민이 대피할 때, 자국민이 전쟁을 체감할 때뿐”이라고 BBC에 전했다.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러시아 본토로 치고 들어간 우크라이나군이 계속 선전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 싱크탱크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마이클 클라크 특별연구원은 10일 더타임스 기고문에서 “러시아 본토 진입은 지금껏 젤렌스키가 내린 가장 위험한 결정”이라면서 “러시아군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상황에 곧 다다를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비견할 정도로 위험한 작전이지만, (성공한) 인천상륙작전과 달리 이번 작전은 전쟁을 뒤집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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