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선균이 실감나게 그려낸 군인… 이 영화의 포인트
[안치용 영화평론가]
(*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기억할 때 통상 감독과 배우를 기준으로 한다. 배우를 언급할 때는 주연을 말하지 조연을 말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빛나는 조연'으로 조연을 거론할 때가 있지만 드물다. 사실 조연은 말 그대로 주연을 돕는 역할이기에 자신이 거론되지 않고 주연이 돋보이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 돋보이지 않아야 돋보인다. 그게 조연의 숙명이다.
역사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더 그렇다. 거의 주연만 기록에 남는다.
▲ < 행복의 나라> 스틸컷 |
ⓒ (주)NEW |
영화 <행복의 나라>는 10.26과 12.12라는 가깝고 익숙한 현실의 역사를 다룬다. 그 역사의 패자, 그중에서 조연을 다룬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할 때 조력한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이 주인공이다. 극중 이름은 '박태주'로 나오며 고 이선균이 배역을 맡았다.
또 다른 주역은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 빌런 전두환이다. 극중 이름은 '전상두'이며 유재명이 연기했다. 영화가 다룬 시기의 실제 직위에 맞춰 합수부장으로 나온다. 세 명의 주연 중 가장 연기 비중이 큰 '정인후'(조정석)는 가공의 인물이다.
법정 '개싸움'의 일인자로 설정된 변호사 정인후는 희대의 정치 재판에 뛰어들어 자신이 변호하는 피고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영화는 역사를 소재로 하기에 사건의 결말이 이미 관객에게 '스포'돼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어떤 결말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과정을 어떻게 보여주고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쟁점이다.
박 대령을 포함한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자들의 첫 재판은 1979년 12월 4일 열렸고 1심 판결은 12월 20일 내려졌다. 유일한 현역 군인인 박 대령에게는 단심이 적용되기에 1심 판결로 사형이 확정됐다. 이듬해 3월 6일 사형이 집행됐다. 나머지 사람들의 재판은 이듬해 5월 20일 대법원 선고가 내려지며 마무리됐다. 속전속결 재판이었다.
▲ < 행복의 나라> 스틸컷 |
ⓒ (주)NEW |
정인후 변론의 요지는 군인으로서 상사의 명령을 수행한, 그것도 사건 발발 30분 전에 내려져 그 정당성을 따져볼 겨를 없이 명령을 수행한 행위가 사형을 받을 만한 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신군부의 겁박 속에서도 박 대령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한 모습이 영화의 큰 얼개다. 그러면서 박 대령이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빛나는 조연'이었으며, 불행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박 대령 삶이 '빛나는 인생'이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실과 픽션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박 대령의 변호인이 가공의 인물인 만큼 그 캐릭터에 만드는 데 상상이 동원됐겠지만, 최근 역사여서 흐름이나 중요한 사실관계에서 영화 전반에 큰 오류가 없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행복의 나라>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다. 영화적 설정에 필요한 가공이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역사왜곡에 이르지 않는다면 용인돼야 한다.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결정적 역사왜곡은 없지 싶다.
▲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
ⓒ (주)NEW |
"나조차도 잘 몰랐던 인물인 박흥주 대령에 대해 자료조사를 하면서 이 사람을 한 번쯤은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겠다"는 추 감독의 생각은 역사의 이 비극적 사건과 이 사건 속의 박 대령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했을 법한 생각이다. 어떤 인물이든, 불가피하게 가해자가 돼야 했던 역사와 삶의 피해자에게 우리는 동감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박 대령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후손은 박 대령에 대한 동정적 시선이 불만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고 이선균은 "강직한 군인에 포커스를 맞춰 연기했다"는 언명대로 박 대령의 캐릭터를 실감 나게 그려냈다.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는 인물이다. 격동의 흐름을 함께 뚫고 나간 특정 역사의 인간군상 모습에 관객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패자 진영에 속한 '빛나는 조연'은 또한 얼마나 빛날까. 이렇게도 생각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그린 우리 당대의 역사를 보며 울분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관객이 울분과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도록 영화를 만들었다면 잘못 만든 영화이다. 영화인이든 무슨 일은 하든,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이 영화가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건 다행스럽다.
고 이선균이 변호사 역할을 맡았으면 어땠을까. 그의 배역이 그의 비극과 겹쳐지기에 부질없이 해보는 생각이다. 이기든 지든, 빛나는 인생은 빛이 난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 < 행복의 나라> 포스터 |
ⓒ (주)NEW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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