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선균이 실감나게 그려낸 군인… 이 영화의 포인트

안치용 2024. 8. 12. 14: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리뷰] 영화 <행복의 나라>

[안치용 영화평론가]

(*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기억할 때 통상 감독과 배우를 기준으로 한다. 배우를 언급할 때는 주연을 말하지 조연을 말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빛나는 조연'으로 조연을 거론할 때가 있지만 드물다. 사실 조연은 말 그대로 주연을 돕는 역할이기에 자신이 거론되지 않고 주연이 돋보이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 돋보이지 않아야 돋보인다. 그게 조연의 숙명이다.

역사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더 그렇다. 거의 주연만 기록에 남는다.

빛나는 조연
▲ < 행복의 나라> 스틸컷
ⓒ (주)NEW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거의 맞는 말이다. 승자는 자신의 선으로 포장하며 자신이 맞선 상대나 상황을 악으로 치부한다. 패자의 우두머리는 그래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패자에도 주연과 조연이 있어 그나마 주연이 이름을 남기지 조연을 묻힌다는 얘기다.

영화 <행복의 나라>는 10.26과 12.12라는 가깝고 익숙한 현실의 역사를 다룬다. 그 역사의 패자, 그중에서 조연을 다룬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할 때 조력한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이 주인공이다. 극중 이름은 '박태주'로 나오며 고 이선균이 배역을 맡았다.

또 다른 주역은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 빌런 전두환이다. 극중 이름은 '전상두'이며 유재명이 연기했다. 영화가 다룬 시기의 실제 직위에 맞춰 합수부장으로 나온다. 세 명의 주연 중 가장 연기 비중이 큰 '정인후'(조정석)는 가공의 인물이다.

법정 '개싸움'의 일인자로 설정된 변호사 정인후는 희대의 정치 재판에 뛰어들어 자신이 변호하는 피고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영화는 역사를 소재로 하기에 사건의 결말이 이미 관객에게 '스포'돼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어떤 결말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과정을 어떻게 보여주고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쟁점이다.

박 대령을 포함한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자들의 첫 재판은 1979년 12월 4일 열렸고 1심 판결은 12월 20일 내려졌다. 유일한 현역 군인인 박 대령에게는 단심이 적용되기에 1심 판결로 사형이 확정됐다. 이듬해 3월 6일 사형이 집행됐다. 나머지 사람들의 재판은 이듬해 5월 20일 대법원 선고가 내려지며 마무리됐다. 속전속결 재판이었다.

영화는 일종의 법정드라마다. 16일간의 재판이 주요한 무대이고 사건이 일어난 10월 26일부터 재판 개시 전까지를 도입부로 보여준다.
▲ < 행복의 나라> 스틸컷
ⓒ (주)NEW
영화에서 군인의 전형으로 그려진 박 대령은 자신이 존경하는 상사의 명령을 따랐고 그 명령을 따른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믿는다. 동시에 명령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경호원들을 살해한 것에 죄의식을 느낀다.

정인후 변론의 요지는 군인으로서 상사의 명령을 수행한, 그것도 사건 발발 30분 전에 내려져 그 정당성을 따져볼 겨를 없이 명령을 수행한 행위가 사형을 받을 만한 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신군부의 겁박 속에서도 박 대령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한 모습이 영화의 큰 얼개다. 그러면서 박 대령이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빛나는 조연'이었으며, 불행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박 대령 삶이 '빛나는 인생'이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실과 픽션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박 대령의 변호인이 가공의 인물인 만큼 그 캐릭터에 만드는 데 상상이 동원됐겠지만, 최근 역사여서 흐름이나 중요한 사실관계에서 영화 전반에 큰 오류가 없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행복의 나라>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다. 영화적 설정에 필요한 가공이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역사왜곡에 이르지 않는다면 용인돼야 한다.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결정적 역사왜곡은 없지 싶다.

'행복의 나라'에 행복한 사람만 가는 걸까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 (주)NEW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로 천만 감독 대열에 오른 추창민 감독은 "어쩌면 역사의 또 다른 줄기에 초점을 맞춰보면 새로운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10.26 대통령 시해 사건과 12.12 군사반란을 다룬 기존 작품들과 달리, <행복의 나라>가 먼저 최악의 정치 재판에 주목하고, 또한 이 두 사건에 걸쳐진 시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조명했다는 설명이다. 추 감독이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재구성할 때 "충실한 자료조사 후 사실에 따라 각색을 진행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고 말한 것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담으려 했다는 뜻이다.

"나조차도 잘 몰랐던 인물인 박흥주 대령에 대해 자료조사를 하면서 이 사람을 한 번쯤은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겠다"는 추 감독의 생각은 역사의 이 비극적 사건과 이 사건 속의 박 대령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했을 법한 생각이다. 어떤 인물이든, 불가피하게 가해자가 돼야 했던 역사와 삶의 피해자에게 우리는 동감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박 대령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후손은 박 대령에 대한 동정적 시선이 불만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고 이선균은 "강직한 군인에 포커스를 맞춰 연기했다"는 언명대로 박 대령의 캐릭터를 실감 나게 그려냈다.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는 인물이다. 격동의 흐름을 함께 뚫고 나간 특정 역사의 인간군상 모습에 관객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패자 진영에 속한 '빛나는 조연'은 또한 얼마나 빛날까. 이렇게도 생각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그린 우리 당대의 역사를 보며 울분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관객이 울분과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도록 영화를 만들었다면 잘못 만든 영화이다. 영화인이든 무슨 일은 하든,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이 영화가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건 다행스럽다.

고 이선균이 변호사 역할을 맡았으면 어땠을까. 그의 배역이 그의 비극과 겹쳐지기에 부질없이 해보는 생각이다. 이기든 지든, 빛나는 인생은 빛이 난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유튜브 영상 보기
▲ < 행복의 나라> 포스터
ⓒ (주)NEW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