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뜯어고치라"더니 최고인민회의 무소식…北, '통일담론' 지켜보나

박현주 2024. 8. 1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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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 남측을 향해 "제1의 적대국"이라며 "헌법을 고치라"고 엄포를 놓은지 반년이 지났지만 '실제 행동'은 늦어지는 분위기다. 북한에서 헌법 개정은 한국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에서 이뤄지는데 아직 개최 소식이 없다. "남측과 모든 걸 단절하라"고 말부터 던져둔 김정은이 이를 행동에 옮기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배경에는 정치적 부담도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연설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노동신문. 뉴스1.


전원회의 직후 열리나 싶었는데…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는 한국의 정기 국회에 해당하며 헌법과 법률 개정, 주요 국가 기구 인사, 예산안 승인 등의 기능을 맡는다. 통상 매년 4월 한 차례 열렸지만 김정은 정권 들어 연 2회 개최로 잦아졌다. 2012년, 2014년, 2019년, 2021년, 2022년과 지난해에 상·하반기 두 차례 개최됐는데 지난해에는 1월과 9월에 열렸다.

올해는 지난 1월 한 차례 개최됐으며, 정부는 당초 이르면 지난 7월 두 번째로 최고인민회의가 열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 6월 말 당 전원회의를 연 직후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후속 조치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었다.

통일부 당국자는 지난 5월 말 기자들과 만나 "전원회의에서 개헌을 비롯한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논의하고 최고인민회의 후 외무성을 통해 대남 조치를 발표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전원회의는 예고된 대로 지난 6월 28일부터 나흘 동안 열렸는데, 이후 최고인민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8~9일 평안북도 의주군 수해 피해 현장을 찾은 모습.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남측을 향해 "한국 쓰레기들"이라며 막말을 쏟아냈다. 노동신문. 뉴스1.


무엇보다 김정은이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명기하고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을 삭제하라"고 명령한 뒤 개헌은 사실상 기정사실화했다. 선대의 유훈을 부정하고 헌법에서 '통일'을 지우는 한편, 한국 헌법 3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와 상응하는 영토 조항을 신설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데 따른 것이다.

김정은은 연이어 지난 2월에는 "해상 국경선"을 처음으로 언급한 뒤 "우리가 인정하는 해상국경선을 적이 침범할 시에는 그것을 곧 우리의 주권에 대한 침해로 무력도발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의 입에서 나온 헌법 개정 사항만 ▲대한민국 주적 명기 ▲통일 관련 표현 삭제 ▲육상·해상 영토 재규정 등 세 가지이다. 문제는 타이밍인데, '실제 조치'는 다소 미뤄지는 분위기다.


'유훈 부정', '국경선 충돌' 부담스럽나


북한이 헌법 개정과 관련해 말부터 앞서고 행동은 늦어지는 현상에 대해 정부는 "김정은 정권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경제난에 수해까지 겹친 가운데 핵 무력을 믿고 선대의 통일 유훈을 지우려는 김정은에 대한 내부 반발을 우려했단 지적이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도 지난 5월 기자간담회에서 "김정은의 선대 업적 지우기가 북한 내부에 이념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북한이 김정은의 주장대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에 자의적으로 '해상 국경선'을 그을 경우 그 즉시 남측의 침범을 용인하는 셈이 돼 반격에 나서야 하는 군사적 부담을 안게 된다. NLL은 그동안 실질적인 남북 간 해상 군사분계선 역할을 해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8~9일 평안북도 의주군 수해 피해 현장을 찾아 이재민을 만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다만 북한이 국경선 설정 작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듯한 동향도 포착돼 주목된다. 김정은은 지난달 중순 강원도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 건설 현장을 찾아 "우리나라는 동서 두 면이 바다와 접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세 면을 바다와 접하고 있다'는 기존 북한 입장과 달라진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번 달까지 한국의 정치적, 군사적 움직임을 살펴본 뒤 이르면 다음달 중 최고인민회의를 열 수 있다고 관측한다. 오는 15일 광복절에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통일 담론'을 발표할 예정인데, 이에 맞서 김정은 또한 차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새로운 국가관을 헌법에 못박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더해 한·미 연합연습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가 오는 19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만큼 관련 동향을 주시한 뒤 개헌의 범위와 수위를 조정할 수 있다.

또한 지난 6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체결된 북·러 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헌법에 반영하기 위한 사전 작업에 착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차기 최고인민회의에선 그간 내부적으로 고취한 대남 적개심을 기반으로 헌법에 새로운 남북 관계 관련 대목을 반영하고 북·러 조약 관련 대목도 상당 부분 반영할 것으로 관측된다"고 말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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