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설계자 신규식…한중 협력 초석 다지다 (3)
쑹칭링 능원(宋庆龄 陵园).
상하이 장녕구 능원로에 있는 쑹칭링 본인과 부모 묘소가 있는 가족 능원이다. 원래 이름은 만국공묘(萬國公墓)였는데 1984년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했다. 쑹칭링은 중국인들이 국부로 추앙하는 쑨원(孫文)의 아내이자 중국의 명예주석이다.
능원 정문을 따라 들어가면 커다란 표지석이 보인다. ‘애국주의 민주주의 국제주의 공산주의의 위대한 전사 쑹칭링 동지가 천추에 길이 빛나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덩샤오핑이 쓴 글이다. 쑹칭링이 중국에서 갖는 무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쑹칭링 능원은 크게 쑹칭링과 가족묘, 명인(名人) 묘원, 외적인(外籍人) 묘원으로 나뉘어 있다. 명인 묘원은 중국을 대표하는 서예가‧화가‧수필가‧영화 예술인 등의 묘가 있다. 외적인 묘원은 중국에 공헌한 외국 저명인사 640여 명이 잠들어 있다.
이곳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도 있다. 대부분 한국으로 유해가 봉환돼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단출한 화강석에 이름 석 자가 박혀 있는 묘지석만 보였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71년 동안 여기에 잠들어 있다가 1993년 8월 5일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신규식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신규식의 묘지석에는 ‘신규식 선생 묘지 1993년 8월 5일 이장 대한민국’이라 쓰여 있다.
신규식은 1922년 쑹칭링 능원에 안치됐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계자’, ‘임시정부의 아버지’ 등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진을 보면 선글라스 같은 짙은 안경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가 웬 선글라스! 라고 의아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연을 들어보면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1905년 11월 한민족의 치욕인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비분강개한 신규식은 3일 동안 단식을 하고 자결을 결심했다. 그리고 독약을 마셨다. 천운인지 서모(庶母) 이씨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 혼수상태에 빠진 그의 입에 냉수를 넣고 양의를 불러 간신히 그를 살렸다. 하지만 독약 기운에 오른쪽 시신경을 다쳐 시력을 잃었다. 그는 “한쪽 눈으로 왜적을 흘겨보자”고 하면서 그의 호를 예관(睨觀)으로 지었다. 예관은 흘겨본다는 뜻이다. 그가 쓴 까만 색안경 속에는 망국의 슬픔을 흘겨볼 수밖에 없었던 깊은 통한이 서려 있는 것이다.
신규식은 1910년 8월 한일병탄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 자결을 시도했다. 때마침 신규식 집을 방문한 대종교 종사 나철이 그를 발견해 극적으로 구조됐다. 두 번의 자결 실패는 살아남아서 독립운동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망국 1년 뒤 1911년 초봄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의 목적지는 상하이였다. 주변 지인들은 대부분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그들이 그곳을 택한 이유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고, 의병‧독립 운동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규식은 달랐다. 그는 “상하이가 광저우를 능가해 크게 발전하면서 국내외 교통이 편리하고 서방 열강의 조계지가 설정돼 청의 간섭을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상하이는 일찍부터 서양인들이 서방 문화를 이식시켜 인쇄‧통신 시설이 비교적 잘 돼 있었다. 이는 독립에 대한 선전과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당시 상하이는 한국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전혀 없었다. 한인이 수십 명 살았지만, 생업이 어려워 그를 반겨줄 사람은 없었다. 신규식이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중국의 진보언론 ‘민립보(民立報)’의 기자 쉬톈푸(徐天復)였다. 이 운명적 만남이 신규식의 미래를 결정했다. 민립보는 신해혁명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고 쉬톈푸를 통해 쑹자오런(宋敎仁)‧황싱(黃興)‧천치메이(陳其美)‧천궈푸(陳果夫) 등 중국 혁명 요인들을 차례로 만났다.
신규식은 이들이 모여 만든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다.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면서 그의 롤모델인 쑨원도 만났다. 그리고 1911년 10월 10일 발발한 신해혁명에 천치메이를 따라 참가했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했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이 중국인과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계기가 됐다.
그 이후 신규식은 1912년 5월 상하이 독립운동기지인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했다. 동제사란 ‘동주공제(同舟共濟)’의 줄인말로 한인들의 친목을 내세운 단체를 표방했지만, 진정한 목표는 독립에 있었다. 동제사는 이후 상하이에 온 김규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정인보‧신석우 등 망명 인사들이 속속 참여했다. 지하 비밀단체였던 동제사는 1910년대 초기부터 중국 관내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 단체였고 상하이를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신규식은 1912년 7월 중국 혁명가들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를 설립했다. 동제사 앞에 ‘새로운 아시아’를 추구한다는 ‘신아(新亞)’를 붙인 것이다. 중국 쪽에서 쑹자오런‧천치메이‧천궈푸 등 30여 명이 참가했다. 신규식의 존재감을 보여준 것이다. 신규식은 이들로부터 중국의 지원을 확보하면서 외교와 교육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무엇이 중요한 지 제대로 간파했다.
중국 혁명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그의 활동은 다양했다. 신규식은 1914년 중국 혁명가들의 문학단체인 ‘남사(南社)’에도 가입했다. 그곳에서 국민당 대원로인 장징장(張靜江)‧천궈푸 등과 사귀었다. 또한 상하이에 조직한 중국인 청년단체 환구중국학생회(寰球中國學生會)에 가입했다. 이것도 중국 혁명의 주도 세력과 연을 맺고 한국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신규식이 중국에서 이런 활동을 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19년 3월 하순 여운형‧선우혁‧김철 등과 상하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다. 이 소식을 들은 국내‧일본‧만주‧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상하이에 집결했다.
드디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신규식은 상하이에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을 다졌지만, 조각에서 제외됐다. 그가 임시정부에 들어간 것은 1919년 4월 30일부터 열린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부터다. 그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됐고 그해 11월 법무총장이 됐다. 그는 1921년 5월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됐고 외무총장까지 겸임했다.
이때 그는 의미 있는 일을 했다. 쑨원을 만나 당장 임시정부 승인은 아니지만 사실상 승인의 효과와 다르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광둥 정부 국회에서 ‘한국독립승인안’을 상정하고 통과시킨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력이 빛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세상 일은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잔뜩 기대를 모았던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철저히 외면당했다. 임시정부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탄이 무효임을 주장하고 한국의 독립을 촉구했다. 하지만 워싱턴 군축회의는 성과 없이 끝났고 임시정부는 크게 실망하면서 내부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를 견디다 못한 신규식은 1922년 3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둥의 군벌 천중밍(陳炯明)이 1922년 6월 쑨원에게 반기를 들었다.
천중밍의 쿠데타 소식은 심장병과 신경쇠약의 증세까지 있던 신규식에게 치명타였다. 그의 상심은 더욱 깊어졌고 그로 인해 병도 날로 악화했다. 그러다 그해 9월 1일부터 25일까지 단식 끝에 숨졌다. 동료들에게 더는 분열하지 말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합하라는 유언을 남기고서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식이 좀 모자라긴 한데” 미국의 전두환 평가 이랬다 | 중앙일보
- '베드신 몸매 보정' 거부한 여배우, 이번엔 뱃살 당당히 드러냈다 | 중앙일보
- "엄마 언제 돌아가세요?"…의사 민망해진 그날 생긴 일 | 중앙일보
- 조국 딸 조민 비공개 결혼식…야권 인사 총출동, 하객 누가 왔나 | 중앙일보
- 역도 캐스터 나선 전현무 "혜정이 가족처럼 중계 몰입했다" | 중앙일보
- 한지민과 열애 최정훈 "그렇게 됐다, 심장 요동쳐 청심환 먹어" | 중앙일보
- [단독] 16세 귀화, 16년간의 기다림…'한국인' 전지희 키운 탁구스승 | 중앙일보
- 성생활 재활? 요즘은 그룹치료하며 동병상련 정보 공유 | 중앙일보
- "잘생기니 알아서 비춰주네"…탁구 동메달 중계 잡힌 뜻밖의 인물 | 중앙일보
- 외신도 놀란 '금욕의 공간' 반전…낙산사 미팅 성공률 60% 비결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