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듣지 않는 청문회
튀는 발언으로 이름 알리는 홍보 무대 전락
22대 국회가 개원하고 겨우 70여일이 지났는데 주요 공직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제외하고도 국회에서 각종 입법·현안 관련 청문회가 8번이나 열렸다. 앞으로 열릴 예정인 청문회까지 합치면 16번에 달한다.
인사청문회가 아닌 청문회가 자주 열리는 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국회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다는 징표이기는 하겠다. 국회법 65조 1항에는 ‘위원회는 중요한 안건 심사와 국정감사, 국정조사에 필요한 경우 증인·감정인·참고인으로부터 증언·진술을 청취하거나 증거를 채택하기 위해 의결로 청문회를 열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지난 8번의 청문회에서 일반 국민이 보기에 의미가 있거나 국민적 의혹을 규명하는 키가 될 만한 증언·진술이 나왔는지는 회의적이다. 의미 있는 증언이나 진술보다는 의원들이 증인·참고인에게 호통을 치거나 여야 의원들끼리 말싸움하는 장면만 뇌리에 남는다. 그러다 보니 이런 청문회에 대한 언론 보도는 대개 ‘맹탕 청문회’ ‘하나마나 한 청문회’ 같은 제목으로 나갔다.
수차례 열린 국회 청문회들이 태산명동서일필(태산이 떠나갈 듯 요동쳤으나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란 의미)처럼 된 건 청문회의 의제 설정부터 정쟁적인 요소가 다분한 게 한몫했다.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에 관한 청문회를 비롯해 지금까지 열린 청문회는 상당수가 채상병 특검법, 방송장악 청문회 등 정치적 이슈나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등 여야 간 입장차가 극명한 사안에 대해 열렸다.
행정 권력이 없는 야당으로서는 자신들이 주도권을 쥔 국회에서라도 청문회를 통해 여론을 반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의도 때문에 여당과 정부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태생적으로 ‘반쪽 청문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9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장악 1차 청문회에서는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과 김태규 방통위 부위원장을 비롯한 증인 16명이 대거 불참했다. 여당 의원들은 “이런 ‘억지 청문회’를 왜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뜨렸고, 마이크를 잡은 야당 의원들도 “핵심 증인이 없으니 물어볼 게 없다”고 했다. 앞으로의 청문회라고 다를까.
청문회에 임하는 의원들의 태도도 문제다. 지난 6월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채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에서 정청래 법사위원장은 증인으로 나온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자신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자 “위원장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어디서 그런 버릇을 배웠느냐”고 호통쳤다. 10분간 퇴장 명령도 내렸다. 표현만 그렇게 안 했을 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같은 태도다. 조선시대 원님 재판이 오버랩된다. 의원이 재판장이 돼서 의혹이 되는 사건 관계자들을 추궁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국회 회의장이 재판정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행태는 청문회 제도의 기본 취지에도 반한다. 청문회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문제에 대해 내용을 듣고 그에 관해 물어보는 모임’이다. 한자로도 ‘들을 청(聽)’에 ‘들을 문(聞)’을 쓴다. 제도의 명칭에서부터 ‘귀 이(耳)’가 두 개나 들어간 청문회인데 정작 청문회를 수행하는 의원들은 듣기보다 말하기 바쁘다. 이미 여의도 정치권에서 청문회는 의원들이 ‘센’ 발언이나 ‘튀는 행동’으로 언론에 자기 이름 한 줄 나가도록 하려는 무대가 돼버린 지 오래다. 요새 의원들은 그 수준을 넘어 지지자들이 즐겨 보는 유튜브 쇼츠(짧은 영상)를 만들기 위해 증인과 참고인을 상대로 호통치거나 면박을 주는 등 의도적 무례까지 일삼는다.
이러니 민의의 전당에서 열리는 청문회가 갈수록 다수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국회 청문회를 지켜보는 일조차 괴롭다. ‘일하는 국회’란 구호는 좋지만 일을 좀 더 맵시 좋게 할 수는 없는 걸까. 정치인들이 생각해볼 문제다.
이종선 정치부 기자 rememb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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