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안세영이 쏘아올린 공
1020 선수들의 활약이 특히 돋보인 올림픽이었다. 어린 선수들이 잘 싸웠고, 세계 무대에서도 꿀리지 않게 밝고 당당한 모습이라 보는 내내 뿌듯했다. 자기표현에 거침없고, 국가적 성원의 무게감에 짓눌리기보다 자신과의 승부를 즐기며 때론 어른보다 성숙했다.
오물쪼물 귀여운 먹방으로 엄마 미소를 짓게 한 스무 살 ‘삐약이’ 신유빈은 아깝게 단식 동메달을 놓친 후, 일본 선수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포옹했다. 이후 기자들 앞에서는 울음을 눌러가며 “하야타 선수가 모든 면에서 앞섰으며 그런 실력과 정신력을 갖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 잘 알기 때문에 인정하고 배울 것은 배우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분루를 삼키는 한·일전의 뻔한 풍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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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빛낸 달라진 1020 선수들
협회 관료주의·소통부재 저격까지
진실공방 넘어 제도개선 계기 되길
」
하위 랭커의 반란을 일으키며 생애 첫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김유진(태권도 여자 57㎏급)은 이변의 주인공다운 당찬 소감을 내놨다. “16년 만의 금메달을 예상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예상은 안 했지만 저 자신을 믿고 하다 보니 잘 됐다”고, “언더독의 반란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엔 “반란이 아니라 제 노력의 결과”라고 답했다. “세계 랭킹 순위에는 신경 안 쓰고, 나한테만 신경 썼다. ···(태극기 세리머니가) 재미있었다. 올림픽에 또 나오고 싶다. ···(후배들에게) 너네도 다 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는 말도 쏟아냈다.
28년 만에 금메달을 따낸 배드민턴의 안세영은 어떠한가. 잔칫날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의례적인 인사 대신 협회의 지원 부실, 부당한 관행 등을 저격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원동력은 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분노였다”고도 했다. 역시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우던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장면이다.
귀국하면서 안세영은 “싸우자는 게 아니라 운동에 전념하고 싶다는 호소”라며 한발 물러섰으나 배드민턴협회는 A4 용지 10장 분량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양측의 진실공방처럼 돼버린 셈인데, 스포츠 평론가 이종훈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선수는 지원이 아쉽다고 하고 협회와 대표팀은 아낌없이 지원했다는 건데, 받은 쪽이 아쉽다고 하는데 진실공방을 해봐야 의미가 없다. 누워서 침 뱉기”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배드민턴협회에만 있다는 낡은 두 규정을 이번 사안의 핵심으로 꼽았다. 만 27세(남자 만 28세) 전까지 국가대표팀에 소속돼야만 국제대회에 나갈 수 있는 규정, 선수 개인 후원 계약 금지 규정이다. 날로 스타가 돼가는 선수가 협회를 통해서만 활동할 수 있으니 코끼리를 작은 욕조에 가둬놓는 격이라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는 설명이다.
과거 이용대 선수 때도 문제가 됐다가 ‘어린 선수가 돈을 밝힌다’(개인 후원 계약)는 식으로 유야무야됐는데, 이번 여론의 방향은 다르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안세영이 협회 계약 협찬사의 운동화가 발에 맞지 않아 어려워했다는 질문에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지만 아직 그런 컴플레인은 한 번도 없었다”고 답하자, ‘컴플레인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했을 것’이라는 댓글이 쏟아졌다. 배드민턴협회가 축구협회보다 임원 수는 많은데 수년간 기부금은 0원이라는 등 협회 운영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협회 입장은 한마디로 우리도 할 만큼 했고 잘하는 선수라고 ‘특별(차별)’ 대우를 할 수 없다는 건데, 그렇다면 굳이 협회가 잘하는 선수의 발목을 잡고 있을 이유도 없는 것 아닐까. 협회가 선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소통 대신 통제·군림하려 한다면 해답은 없다. 시시비비는 가려야겠지만, 소모적 진실공방이 아니라 잘못된 제도 개선에 초점이 맞춰져야 이번 사태가 의미 있게 마무리될 것이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파리 올림픽의 선전을 회장 지시로 실시된 선수들의 ‘해병대 입소’ 체험 덕이라고 자평했다는데, 과연 해병대 캠프가 MZ세대 선수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도 의문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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