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코리아] 선수 위에 군림하는 경기단체
지난 3일 경남 창녕에서 대한축구협회가 주최하는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대학부 결승이 열렸다. 낮 최고 기온이 37도에 달하고, 경기 직전엔 소나기까지 내려 불쾌지수가 세자릿수에 육박했다. 라커룸조차 없어 하프타임에 선수들은 온돌마루 같은 인조잔디에 앉아 숨을 돌렸다. 경기가 끝나고 사달이 났다. 한 선수가 호흡 곤란과 마비 증상을 보이며 쓰러졌다. 응급조치를 서두른 덕분에 의식을 되찾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사건을 몇몇 언론이 보도했다. 쉬쉬하던 축구협회에 비난이 쏟아졌다. 대회를 주관한 여자축구연맹 관계자는 최근 감독들이 모인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반애원·반협박투였다. 학부모나 선수들이 언론에 제보하지 못하도록 감독들이 ‘관리’하라는 지시는 웃어넘길 만했다. 선수들은 여성으로서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탈의실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관계자의 반응에 경악할 금치 못했다. 탈의실을 마련하면 에어컨까지 설치해달랄 게 분명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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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회 겨냥한 안세영의 작심 토로
선수 목소리 반영 않는 현실 지적
선수와 소통해야 협회 지속 가능
」
파리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금메달 5개가 목표라는 대한체육회의 겸손을 비웃고 싶었나. 우리 선수들은 최고의 기량을 뽐내며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은 지난 5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 느낌이다.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28년 만에 금메달을 선사했던 안세영의 작심 토로가 분수령이었다. 안세영은 이날 “대표팀과는 계속 가기 힘들 것 같다”며 대한배드민턴협회에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안세영의 발언은 모든 올림픽 이슈를 덮어버렸다. 선수들이 어렵사리 따낸 메달은 뒷전으로 밀렸다. 대신 경기단체 임원들의 비행기 좌석 등급 같은 사안들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안세영은 현재까지 입장을 추가로 밝히지 않고 있다. 배드민턴협회도 해명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맞불을 놓았다. 진실 공방만 남은 형국이다.
“경기단체가 우리 목소리를 듣지 않고 군림하려고만 한다”는 선수들의 하소연은 엄살이 아닌 듯하다. 대한체육회는 선수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경기단체에 선수위원회를 설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단체는 선수위원회를 조직도에서 빼거나 구성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배드민턴협회는 선수위원회를 두고 있다. 그런데 위원들 면면을 살펴보면 구색 맞춤에 불과하다. 중학교 교사가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6명의 위원은 학교팀이나 클럽팀 지도자 일색이다. 선수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게 불가능하다. 배드민턴협회는 김택규(사진 왼쪽) 회장을 포함해 부회장·이사 등 임원진이 40명이나 된다. 하지만 선수들을 대신해 의견을 개진할만한 위치에 있는 임원은 보이지 않는다.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규모가 가장 크다는 대한축구협회조차 선수 인권을 지켜달라는 목소리에 귀를 닫는 마당이니 다른 단체는 오죽하겠는가.
올림픽이라도 열려야 관심을 받는 비인기 종목 단체의 사정도 딱하긴 하다. 이번 일이 터지자 배드민턴협회는 “손흥민이나 김연아급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며 안세영을 깎아내렸다. 기업은 스타 선수를 마케팅에 활용하기 위해 경기단체에 후원금을 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대기업이 발을 빼면서 비인기 종목 단체는 더 어려워졌다. 정부가 세금으로 훈련비를 일부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은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한다. 이번 파문은 스타급 선수와 소통해 파이를 나눠야 경기단체의 지속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젊은 세대는 안세영의 발언을 경기단체 어르신들의 ‘꼰대’ 근성에 대한 저항으로 여긴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이번 올림픽 선전은 해병대 입소 훈련의 결과물”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실제로 국가대표 선수들은 지난겨울 해병대에 입소해 2박 3일 극기훈련을 받았다. 해병대 입소 훈련은 대한체육회 수장의 마인드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보여준 사례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사안을 입맛대로 써먹을 태세다. 의정갈등을 비롯해 여러 현안에 여념이 없을 대통령실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안세영 파문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가뜩이나 대한체육회장의 임기를 놓고 각을 세웠던 터. 문화체육관광부를 앞세워 강도 높은 진상조사를 벼르는 중이라고 한다. 이번 기회에 경기단체가 선수 위에 군림하는 폐단이 일소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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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옥 고려대 국제스포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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