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2024년 대한민국 활자 잔혹극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소설 『활자잔혹극』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첫 문장부터 범인과 피해자, 그리고 범행동기까지, 추리 소설의 모든 패를 깐 셈. 범인 유니스는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한 집안의 가정부로 지낸다. 고용주 커버데일 일가가 이 사실을 간파하자 굴욕감에 그들을 몰살한다.
소설을 쓴 루스렌델(1930~2015)은 추리작가협회 ‘골드 대거상’을 4차례 수상하고, 왕실에서 작위까지 받은 영국의 대표적인 스릴러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수수께끼 같은 단서들 대신 사회 의식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독자들에게 추리의 묘미를 빼앗을지언정 전하는 통찰력은 상당하다.
작가가 보는 문맹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방어에 열중한 나머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무디게 하는 장애물이다. 신문은 물론 간단한 소통을 위한 쪽지나 표지판도 못 읽는 유니스는 총잡이, 도박꾼이 등장하는 TV 수사 드라마의 광팬이다. 컬러TV의 대중화가 시작됐던 1970년대에 쓰인 소설은 영상이 일방적으로 전하는 폭력성에 우려를 표한다.
2024년 한국의 문맹 현황은 어떤가.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글을 읽는 사람은 점차 사라지는 신(新) 문맹 시대다. ‘1년간 전체 성인의 절반 이상이 책을 1권도 안 읽었다’(문체부, 2023 국민독서실태)는 다소 예상 가능한 독서율 문제를 짚으려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서울 은평구에서 120㎝ 일본도로 친분도 없는 이웃을 살해한 범인은 “(피해자에 죄송한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정신 병력도 없었던 그의 범행 동기는 “피해자를 스파이”라 생각했다는 것. 1년 전 14명의 사상자를 낸 서현역 칼부림 사건의 범인 최원종도 피고인 신문에서 “스토킹 집단이 무섭고 화가 나 범행했다”고 주장했다. 수사극 속 인물이 된 양 일가족을 살해하고, 이후 드라마 시청을 이어간 소설 속 유니스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다.
유니스의 자기방어가 범죄로 진화하기까지 TV가 있었다면, 신문맹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인터넷이 있다. 현실 속 복잡한 문제들을 굳이 ‘안’ 읽어도, 머릿속 스파이·스토킹 집단을 지지해 줄 목소리는 인터넷에 한가득이다.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 살인예고·모방범죄가 잇따르는 사회 문제는 남 일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지금 바로 휴대전화를 켜고 SNS나 포털 앱을 켜보자. AI 알고리즘 추천·맞춤형 피드, 내 입맛에 맞춘 세상이 고스란히 열린다. 거슬리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읽어야 할 의무는 없다. 신문맹 시대에 기괴한 사건·사고들이 잇따르는 건, 각자의 고립된 세계관이 현실에서 충돌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환희 IT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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