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앞 "긴 밤 지새우고" 노래, 박정희 때 벌어진 일

황광우 2024. 8. 1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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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형을 보내며

[황광우 작가]

김민기와 양희은, 임진택과 채희완. 이들은 어두웠던 시절, 한국의 민중문화예술운동을 이끈 선구자였다. 노래는 양희은, 작곡은 김민기, 판소리는 임진택, 기획은 채희완이 나눠 맡았다.

1979년 12월 그들은 광주에 와서 민중문화예술의 씨를 뿌리고 갔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속에는 이들의 꿈이 한송이 열매로 영글었다. 그것이 도청 분수대 앞에서 진행된 민주수호시민대회였다. 1981년 전두환은 '국풍 81'을 기획했고, 김민기와 임진택을 회유했다. 그러나 형들은 독재자가 내민 손을 거절했다.

2004년 1월, 나는 광주로 초대해 김민기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좀체, 도무지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김민기이지만, 광주의 이름으로 호명한다면 젊은 날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광주에 오지 않을까, 나는 희망했다. 늦었다. 암이 형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비보가 왔다.

누군가에는 '청춘' 그 자체였던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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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는 내 청춘의 우상이었다. 아니 나의 청춘이었다. 우리의 청춘은 하루를 노래로 시작해 노래로 마감했는데, 스무 살 청춘을 돌이켜보니 나는 종일 김민기의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1977년 4월이었다. 내가 들어간 써클 '사회과학연구회'는 남이섬으로 M.T.를 갔다. 열차 안에서부터 선배들은 열심히 노래를 가르쳤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목에 힘을 주고 떠든 선배들의 장광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밤늦도록 노래를 배운 것은 기억이 난다. 형들은 <아침 이슬>을 가르쳐줬고, <강변에서>를 가르쳐줬다.

서울은 매력적인 도시다. 한강처럼 유장하게 흐르는 강이 또 있을까? 아마도 길림의 송화강을 제외한다면 한강처럼 매혹적인 강은 없을 것이다. 파리의 센 강이나 런던의 템즈강은 한강에 견줄 강이 아니다. 로마의 티베르강은 한강에 비하면 또랑에 지나지 않는다.

한강대교 너머로 노을이 지면 저기 멀리 강변에서 흰 연기가 뿜어나온다. 당인리 화력발전소의 연기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그 시절, <강변에서>를 즐겨 불렀다. 한창 공업화가 추진 중이었던 때, 산동네 꼭대기엔 빈민가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고,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지친 얼굴로 퇴근하던 시절이었다.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순이는 우리의 누이였다.

학회에서 선배들을 만났고, 동료들을 만났다. 75학번의 박병태, 김석준, 부윤경 76학번의 김병렬, 권호영, 이원주 77학번의 정광필, 유대기, 이홍동 이들이 나의 대학 생활을 수놨다. 역시 학회 생활의 꽃은 농촌활동이었다. 우리는 전라남도 곡성하고도 외진 곳에 위치한 죽곡 마을로 떠났다. 알고 보니 이곳은 1950년대 활약한 전남 빨치산의 주무대였다. 그만큼 외진 곳이었다.

아침부터 불볕더위였다. 쨍쨍 내리쪼이는 햇살을 뚫고 우리는 담뱃잎 사이를 기었다. 농촌의 일은 고됐으나, 농촌의 황혼은 아름다웠다. 하루의 활동을 평가하는 총화를 마치고 우리는 또 노래를 불렀다. "갈숲 지나서 산길로 접어 들어와 몇 구비 넘으니 넓은 곳이 열린다. 길섶에 핀 꽃 어찌 이리도 고우냐." 나는 75학번 박병태에게서 이 노래를 배웠다. 그는 노신 문학의 애호가였다. 1980년 6월 휴가차 서울에 나왔는데, 보안대에 끌려간 이후,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병태 형이 애창한 <가뭄>이 김민기의 작품인 것을 그때에는 몰랐다.

도서관에서 "긴 밤 지새우고"... 식당에서는 "풀잎마다 맺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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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은 박정희의 압제가 캠퍼스의 목을 조르던 시절이었다. 독재의 부당성을 폭로하기 위해 시위를 했지만, "학우여!" 외마디를 지르고 '짭새(형사의 은어)'들에게 붙들려가는 형국이었다. 봄부터 몇 차례의 시위 기도가 있었으나 학원의 봄은 오지 않았다.

2학기가 시작됐다. 9월 어느 날이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도서관 앞 계단에서 학생들이 "긴 밤 지새우고"를 부르는 것이다. 이내 식당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학생들이 "풀잎마다 맺힌" 부르는 것이다. 이내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진주보다 고운 아침이슬처럼"을 합창하는 것이다.

아, 그날의 감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울컥이면서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 노래는 김민기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 모두의 노래였다. 얼어붙은 동토의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억압을 뚫고 나오는,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노래였다.

관악 캠퍼스 맞은편에는 '강 건너' 주막집이 있었다. 형사들에게 붙들려 끌려가는 형들을 구출하지 못한 우리들은 주막집 '강 건너'에 모여 또 노래를 불렀다. '내 머리속으로 차돌멩이로'를 불렀고,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겠지'를 불렀다.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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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전남 완도의 외딴 섬 고마도다. 통통배를 타고 20여 분 물살을 가로질러 가면 포구가 나온다. 배가 포구에 닿으면 섬에 사는 형님이며, 형수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옷따, 옷따, 도련님 오시오?" 대학에 들어가고 처음 방문하던 때, 나는 무척 당혹하였다. 아직 사법고시도 보지 않은 내게 섬 주민들은 "황 검사님, 오셨네"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내가 독재체제의 하수인이 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던가?

섬 주민들의 호칭은 나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놨다. 죽고 싶을만큼 고통스러웠다. 돌아오는 통통배에서 나는 혼자 나직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냐. 저 깊은 바닷속에 홀로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1977년 12월에서 1978년 1월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나는 인천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을 자주 만났다. '똥물 사건'이 터졌다. 여성노동자들은 사측의 사주를 받는 남성노동자들의 린치와 폭력에 맞서야 했다. 옷을 벗었다. 브래지어도 벗었다. 팬티만 입은 채 여성들은 나체로 싸웠다.

그때 우리를 위로한 음악이 있었으니, <금관의 예수>였다. "오 주여, 지금은 어디에" 테이프를 틀었다. <공장의 불빛>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어요. ~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1978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어쩌면 2년 후 일어날 1980년의 항쟁을 예비한 한 해였는지도 모른다. 1978년 4월엔 광주의 북동성당에서 고구마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함평 농민들의 농성이 있었다. 1978년 5월에는 서울대 캠퍼스에서 대규모 시위가 터졌고, 이어 6월에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집결하여 함성을 질렀다.

다시 광주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한 것으로 연행당하고, 퇴직당한 교수들을 위해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학생과 조선대학생은 계림동으로, 충장로로, 도심의 거리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1978년 9월이었던가. 나는 대방동에 있는 야학에 출입했다. 그때 만난 야학의 청소년들이 무척이나 애잖았다. 나도 모르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입에서 나왔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눈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유인물 한 장 뿌리다 잡히면 징역을 사는 시절이었다. 긴급조치 9호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나는 서울의 산동네며, 캠퍼스며, 지하철이며, 다방에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그리고 입대했다. 대구 천위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대구 5관구 헌병대 영창에 감금돼 지옥의 영창 생활을 했다.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양산에 있는 제2 육군교도소에 수감됐다.

군 교도소는 민간교도소와 여러모로 달랐다. 민간교도소에서는 죄수들이 자신의 방에서 밥을 먹지만 군 교도소에선 대오를 지어 식당으로 걸어가 식사를 했다. 뜬구름만 봐도 이곳을 언제나 빠져나가나 가슴이 답답했다.

군 교도소는 빠삐용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밤이면 혼자 찬 마룻바닥에서 모포 한 장으로 잠을 잤다. 비가 오면 철창을 부여잡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노래를 불렀다.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 부모 병들어 늙으신 3년에 뒷산에 약초 뿌리 모두 캐어드렸지" 눈물은 하염없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1979년 7월 17일 출소했다. YH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했다. 그런데 농성 중이던 여성노동자가 추락했다. 고향이 광주인 그녀의 이름은 김경숙. 우리는 무등산 깊숙한 곳에 집결해 김경숙을 애도했다. 그때 <상록수>를 불렀다.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를 숨죽여 불렀다.

100만명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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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 고조되면 김민기는 뒤로 물러앉았다. 1980년에서 1987년까지를 회고하면 김민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전투적인 군가풍의 운동권 노래가 유행했던 것 같다. 전두환을 몰아내는 싸움은 치열하게 진행됐다. 1987년 7월 9일 서울 시청 앞에 100만 대오가 모였다. 거대한 군중이 합창을 했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앞에 나서길 싫어했던 형, 늘 뒤에서 일하길 좋아했던 형, 하지만 100만 명의 심장을 뛰게 한 형이었다. 김지하는 이런 말을 남겼다.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면 쓸쓸함, 맑음, 쾌활함이 인다. 죽음과 고문의 시대를 산 우리에게 그의 노래는 저항이었고 대안이었다. 그 절정이 <아침 이슬>이다. 미지의 광야로 무한히 열리는 <아침 이슬>의 마지막 소절은 약속과 창조의 땅으로 나아가는 고달픈 유랑민의 복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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