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바람 바람 바람

2024. 8. 1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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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휴가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든 거리, 간간이 부는 바람마저 뜨겁다. 오늘도 에어컨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더운 날씨다. 그 뜨거움을 뚫고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며칠 동안 깎지 않은 듯 수염은 덥수룩하고, 세상만사 고민을 혼자 짊어진 듯 어두운 표정이다. ‘그’와 상담한다.

약 14년 전, 그는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아내를 보고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아내도 그가 싫지 않았던지 이내 연인관계로 발전하였고, 이듬해 결혼했다. 아이 둘을 낳고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이어오던 중, 회사가 망하면서 그도 실업자가 되었다. 불행의 시작이다.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잘 알지 못하던 위험한 투자에 나섰다. 대출까지 받아 코인과 주식에 투자했으나 수익은커녕 원금만 80%를 잃었다. 생활비는 고사하고 대출이자도 갚지 못하게 되자, 이를 만회해 보려는 욕심으로 도박에 손을 댔다. 그러나 도박 빚은 더욱 가혹했다. 도박하라고 돈을 꿔준 사람들이 밤낮없이 전화해서 온갖 협박을 하며 변제를 독촉했다. 결국 빚쟁이들이 집에까지 찾아왔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그는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내는 그동안 받은 생활비가 노름빚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울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아내는 친정 부모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친정 부모는 집을 담보로 빚내서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다행히 이 돈으로 그는 빚 독촉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아내와 장인 장모에게 큰 빚을 진 그는 정직하고 바르게 돈을 벌기로 마음먹고 화물차 운전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화물차 운전을 한 친구의 도움이 컸다. 그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화물차에서 먹고 자면서 밤낮없이 전국을 다니며 일했고, 5년 만에 장인 장모의 빚을 모두 갚았다. 장인 장모의 빚을 모두 갚던 날 장인 장모는 물론 아내와 그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또 다른 불행이 닥쳐오고 있음을. 그가 화물차 운전을 하면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아내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일이 잦아지고 밤에 누군가와 자주 통화하였다. 때로는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집에 둔 채 밤늦게 귀가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언제 오냐’고 그에게 전화하곤 했다. 그는 여전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고 혹여라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대면할까봐 섣불리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을.

사무실을 방문하기 전날 그는 아내의 핸드폰을 열어봤다. 어떤 남자와 주고받은 문자가 있었다. 이미 의심의 싹이 튼 그에겐 일상적인 문자조차 음탕하게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녹음 파일도 찾아보았다. 설마 했지만, 몇 개의 파일이 남아있었다. 거기에는 문자보다 더 적나라한 관계가 담겨있었다. 더는 참지 못한 그는 아내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아내는 결국 모든 걸 털어놓았다. 작년에 친구들과 술집에 갔다가 만났는데, 그때부터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그 남자와의 관계를 청산할테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그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집을 나왔다.

그리고 오늘 초췌한 모습으로 필자를 찾아와 아내와 이혼하고 상간남도 응징하고 싶다고 했다. 상담 중에도 아내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문자가 계속해서 울렸다. 필자는 나중을 위해서라도 상간남에 대한 응징은 필요해 보이나, 아내와의 이혼은 재고해 보라고 권했다.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 또한 사무실에 오기 전부터 수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사무실을 나서면 바람 한 점 없는 뜨거운 거리에 서서 또 고민할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난 자리가 유독 더 뜨겁다. 이래저래 참으로 더운 날이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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