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러 본토 급습해 영토∙포로 확보…"종전협상 유리한 패 쥐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를 급습해 영토를 점령하는 작전을 펼치며 "하르키우 탈환(지난해 9월) 이후 최대 성과"(CNN)를 올리자,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번 작전으로, 오는 11월 미국 대선 이후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 종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리한 패를 쥐게 됐다는 관측도 나온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정례 연설을 통해 “전쟁을 침략자들의 영토로 밀어내기 위한 작전 중”이라며 자국군이 러시아 본토로 진격해 군사작전 중이란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이어 “우크라이나는 정의를 회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침략자들에게 필요한 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젤렌스키의 이번 발언은 지난 6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쿠르스크주(州)로 진격해 교전을 시작한 지 나흘만에 나왔다. 그간 젤렌스키는 이 작전에 대해 함구했다. 다만 지난 8일 “러시아가 우리 영토에 전쟁을 몰고 왔으니, 그들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느껴봐야한다”고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푸틴 리더십 타격, 러軍 수장 경질설까지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의 침투 닷새째인 10일에도 이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지 못한 상태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전투가 쿠르스크주 말라야 로크냐, 올고프카, 이바시코프스코예 등 국경에서 10∼20㎞ 안쪽에 있는 지역에서 집중됐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군사 블로거들은 우크라이나군이 이날 쿠르스크주의 플레호보를 추가로 점령했다고 전했다. 앞서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우크라이나군이 6~8일 사흘간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에서 약 33.8㎞ 지점까지 전진해 350㎢에 이르는 러시아 본토를 점령했다고 추산한 바 있다.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자국 영토 일부를 적군에게 점령당한 상황이다.
외신은 우크라이나군이 해당 지역의 원자력 발전소와 가스관 등 에너지 기반 시설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쿠르스크의 주요 도시인 수드자에는 러시아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공급하는 가스관 시설, 쿠르차토프에는 대규모 원자력 발전소가 각각 위치했다.
우크라이나군의 61기계화여단은 전날 밤 수드자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텔레그램을 통해 밝히면서 현장에 있는 자국 군인들의 영상을 공개했다.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사톰은 성명에서 “우크라이나군에 의한 공격과 도발은 원전에 실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현재 원전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의 침공 시도를 계속 격퇴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군사블로거와 전문가들은 상황이 심각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퇴역 장성인 러시아 의회 의원 안드레이 구룰레프는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이른 시일 안에 쫓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러시아 반테러위원회(NAC)는 우크라이나와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쿠르스크 등 남서부 접경 지역에 대(對) 테러 작전 체제를 발령했다. 러시아 당국은 전날 쿠르스크에 연방차원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접경지에서 열차편으로 이날 모스크바에 도착한 한 여성은 AFP에 익명을 전제로 “전쟁이 닥쳐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쿠르스크 국경지대에서 대피한 인원은 최소 7만6000명이다.
뉴스위크는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 총참모장의 경질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게라시모트 총참모장은 우크라이나군이 쿠르스크 공격을 준비한다는 첩보를 무시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지난 7일 푸틴 대통령이 소집한 안보 회의에 불참해 의구심을 키웠다.
우크라이나군 조기 격퇴에 실패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도력에도 타격을 입게 됐다고 CNN은 전했다. 러시아의 친정부 분석가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이는 정보체계 전체의 실패이자, 푸틴에게도 타격이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맹방 벨라루스도 국경 경계 강화에 나섰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전날 우크라이나 드론이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며 접경지 병력 증강을 지시했다. 벨라루스 외무부는 이날 올가 티무시 우크라이나 대리 대사를 초치해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사기올린 우크라, 종전협상 유리한 패 확보
반면 그간 러시아의 공세에 고전하던 우크라이나는 개전 이후 러시아 본토에 대한 최대 규모 반격에 성공하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또한 대러 반격 의지를 재확인시킴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고 지지부진해졌던 서방의 지원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영국 국제전략연구소(IISS)의 선임연구원 프란츠 스테판 가디는 “우크라이나가 적의 영토에서도 복잡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미국 등 서방 동맹국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 이후 열릴 가능성이 있는 종전협상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리한 패를 손에 쥐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로 젤렌스키는 이번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포로와 맞바꿀 러시아군 포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면서 우크라이나군을 치하했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이번 진격으로 확보한 쿠르스크 국경지대 점령을 굳힌다면, 종전협상에서 러시아에 빼앗긴 우크라이나 영토를 돌려받는 중요한 카드로도 쓰일 여지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우크라이나 주재 서방 외교관은 이번 러시아 본토 급습이 미국 대선 전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국제사회 이슈로 떠올릴 수 있는 ‘완벽한 시점’에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작전 이전에 우크라이나는 협상에 들고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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