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삶이 교차하는 곳… 제주의 여름 보내는 법 [제주라이프]
“멸치 언제 나와? 나오는 거 맞냐고?”
한 시간째 밤바다를 ‘직관’하던 초등학생 아들이 급기야 성질을 냈다. 제주 문화를 알려주겠다며 뜨거운 모래사장에 한 시간째 참고 앉았는데, 예정 시간이 지나도록 그물이 움직일 기미가 없다. 둥둥 떠 있는 노란 그물 부표가 얄미울 지경이다. 해는 저물었지만, 바다엔 한낮 열기가 그대로다.
멀리 테우가 보였다. “전에 박물관에서 봤었지? 저게 나무로 만든 제주 전통 배야.” 예전에는 부력이 뛰어난 구상나무로 만들었는데 구상나무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삼나무를 쓰기 시작했다는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무더위에 ‘TMI’(과도한 정보)라는 원성을 들을 게 뻔했다. 대신 조금 전 횃불 행진에서 본 해녀와 마을 주민들이 입고 있는 갈옷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며 시간을 벌었다.
드디어 그물 치기가 시작됐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물 부표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곧 있으면 그물이 모래사장으로 다가오고, 마침내 멸치가 반짝반짝 화려한 은빛 비늘을 자랑하며 물 위로 튀어 오를 것이었다. 주민들은 손에 든 횃불을 더 높이 치켜들었다. 안전요원의 움직임도 부산해졌다. “다칩니다. 뒤로 가세요. 더 뒤로 가주세요.”
지난 3일 이호테우축제 ‘멸치잡이 재현’ 행사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렸다. 여기저기서 기대에 찬 목소리가 들리고, 주민들이 힘을 합쳐 그물을 밖으로 끌어냈다. “영차, 영차, 영차.” 마침내 기다리던 그물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차, 그런데 멸치가 튀지 않는다. 김밥처럼 말려 올라온 그물엔 미역 반 멸치 반이다. 예전에는 물 반 고기 반이랬는데, 너무 기대를 하고 온 걸까. 난감함과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던 그때, 아이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이가 물었다. “원래는 멸치가 엄청 많아서 사람들이 막 주워 담아 가고 했던 거야? 좋은 아이디어네. 포켓몬 배틀에도 그런 전략이 있어. 더블배틀의 협동 전술. 특히 하늘을 나는 비행 타입 포켓몬들이 협동 전술에 중요한 역할을 해.”
그러고 보니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제주 마을에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 어업이지 멸치 떼의 화려한 군무가 아니었다. 아이의 해석이 고마워 얼른 말을 보탰다. “그러네. 협동은 중요한 배틀 전술이지? 그럼 아까 아저씨들과 해녀 할머니들은 물에 있었으니까 물타입이라고 해야 되는 건가?” “흐응, 그럴지도.”
8월, 무더위가 절정에 달하고 있다. 해변은 인파로 넘쳐난다. 해수욕장 축제도 이 무렵에 가장 많다. 7월 말 삼양검은모래축제를 시작으로 이호테우축제, 금능원담축제, 표선해비치하얀모래축제 등이 잇달아 열린다. 축제 이름에서 보듯 해수욕장을 가진 마을은 고유의 자원을 활용해 저마다 치열하게 한여름 피서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삼양동은 철분이 함유된 검은 모래찜질을 특장 콘텐츠로 내걸었다. 삼양해수욕장 모래는 입자가 고와 9월까지도 모래찜질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찜질 후 뜨겁게 달궈진 몸을 차가운 용천수로 식히면 그야말로 이열치열형 피서가 따로 없다.
이호동은 전통 어업문화가 강점이다. 이호테우축제에선 테우 진수식, 멸치잡이 재현, 해녀 횃불 행진을 볼 수 있다. 멸치잡이는 바닷가 마을에서도 모래벌판이 넓게 깔린 마을에서만 할 수 있다. 이호동을 구성하는 5개 자연마을 주민들은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멸치잡이를 해왔다. 누군가 ‘멜(멸치) 들었져’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족바지(뜰채)를 들고나와 멸치를 퍼갔다. 제주에선 지금도 ‘사람이 많다’는 표현으로 이 말을 자주 쓰는데 여기서 유래했다.
한림 금능은 바다에 쌓은 돌담, 원담을 소재로 축제를 연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조간대에 돌담을 쌓아두었다가 밀물에 들어온 고기가 썰물에 갇히면 잡는다. 일종의 돌그물이다. 예전엔 360개가 넘었다고 알려진다.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금능은 원담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대표적인 마을이다. 피서객들은 원담에서 맨손으로 고기를 잡으며 체험 물놀이의 진가를 맛본다.
제주에서 여름을 나는 또 다른 장소가 있다. 같은 바다지만 해변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 포구다. 예전에는 배가 드나드는 길목이었다. 어업이 줄면서 기능이 감소한 포구에 물놀이객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해수욕장이 해수욕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곳이라면, 포구는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을 즐기는 이들이 모인다. 그에 맞춰 포구 주변엔 물놀이 장비 대여 업체와 편의점, 카페, 고깃집이 줄지어 들어섰다.
판포포구는 물놀이 명소로 떠오른 지 오래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풍차가 보이는 풍경이 이국적이다.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 놀기에도 좋다. 최근에는 선인장 마을 월령포구에도 사람이 몰리고 있다. 제주도가 티맵 내비게이션 데이터를 분석했더니 2022~2023년 도착 수를 기준으로 포구 가운데에는 판포포구가 가장 많았다. 이어 법환포구, 월령포구, 강정포구가 2~4위를 차지했다. 제주도는 지정해수욕장은 아니지만, 물놀이객이 몰리는 곳을 연안해역 물놀이 장소로 정해 개장 기간 민간안전요원을 배치하고 있다. 판포포구 등 19곳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름이면 어느 계절보다 낭만이 흘러넘치는 제주 바다. 하지만 화려한 풍경 한쪽에는 소박하고 고됐던 제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스며 있다.
제주도의 해안선은 단조롭고, 암초가 많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도 크지 않아 배를 정박할 만한 포구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제주에는 90여개의 포구가 있지만, 자연적으로 생겨난 포구는 온평과 월평포구 등 몇 곳뿐이다. 대부분은 사람들의 고된 노동으로 만들어졌다.
조선 중기에 간행된 ‘남사록’에는 ‘제주의 해변은 바닥이 얕고, 바위는 뾰족해 배를 부수기 일쑤다’라는 기록이 있다. 제주 사람들은 이러한 여(물속 바위)나 코지(바다 쪽으로 뾰족하게 뻗은 땅덩이나 바윗덩이)에 버팀돌을 놓고 간조 때마다 하나씩 돌을 쌓아 포구를 완성했다. 영조 11년(1734년) 화북포구에선 포구 확장공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제주목사 김정은 직접 등짐을 지어 돌을 나르며 부역을 독려했는데,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과로한 것이 원인이 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제주 사람들에게 포구가 얼마나 중요하고, 동시에 힘든 공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주에서 여름은 노동의 계절이다. 자갈이 많은 땅이라 여름에는 날씨로 인한 어려움이 더 컸다. 초여름 보리 수확이 끝나면, 조 콩 메밀 등 잡곡을 파종하고, 맹더위 속에 여러 차례 김매기를 거듭했다. 중산간(한라산에서 해안으로 내려오는 해발고도 200~600m 구역) 초지에서 소나 말을 방목하는 경우에는 더위, 장마, 태풍과 같은 궂은 날씨에도 야외 생활을 하며 가축을 돌봤다.
여름은 특히 해녀들에게 잠수 일이 주가 되는 시기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4~9월까지 하루에 6시간 정도 잠수 일을 했다. 가을 겨울철의 두 배다. 땅이 척박한 제주에서 바다는 수입원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생계 공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를 ‘바당밭’이라고 불렀다.
해안 마을의 여성들은 집안일과 밭일, 물질은 물론 진상 부역까지 담당해야 했다. 출산 전후 물질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추운 계절에 변변한 장비 없이 찬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제주 해녀는 1960년대 2만3000명에서 지난해 2800명선으로 떨어졌다. 해녀가 되기 위해서는 대를 잇거나, 해녀학교를 졸업한 뒤 인턴 해녀를 거쳐 어촌계에 신규해녀로 가입해야 한다. 제주에는 해녀학교 2곳이 운영 중이다.
이렇게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제주 사람들도 여름에는 더위를 이기기 위해 바닷가에서 모래찜질을 하거나 폭포로 물맞이를 갔다. 모래찜질은 제주어로 ‘모살(모래)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신경통과 피부병 등 각종 질환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백중날 물맞이’ 풍속이란 것도 있다. 음력 7월 15일인 백중날 물을 맞으면 위병, 허리병, 열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백중은 전통적인 보름 명절의 하나로, 농민들의 여름철 휴한기다. 제주 사람들은 휴한기에도 백중날엔 살찐 해산물들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밤에 횃불을 들고 늦도록 해산물을 따기도 했다.
사람들은 무덥고 습한 날씨를 버티기 위해 그물처럼 구멍이 큰 조끼나 토시를 만들어 입었다. 감물을 들여 만든 갈옷은 때가 잘 묻지 않고, 몸에 붙지 않아 여름에 입기에 좋았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여름을 나기 위한 음식이 있었다.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쉰다리는 여름철 대표 음료다. 곡식 농사가 힘들었던 제주에선 어쩌다 찬밥이 생기면 깨끗하게 모아두었다가 누룩과 물을 섞어 상온에서 발효시켰다. 발효가 끝나면 약한 불로 살짝 끓였다가 식혀 시원한 곳에 보관해 두고 먹었다. 막걸리와 비슷한 맛이다. 지금은 마트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음력 6월 20일은 ‘닭 잡아먹는 날’이다. 이날이 되면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아 닭죽이나 닭제골로 만들어 먹었다. 닭제골은 마늘로 가득 채운 닭을 중탕하여 만든 음식이다. 보신 음식으로 많이 먹었다. 무엇보다 여름 하면 물회를 빼놓을 수 없다. 예전에는 물회라고 하면 자리물회를 뜻했다. 5~6월 자리철이 되면 된장을 푼 냉국에 자리돔을 뼈째 썰어 시원하게 먹었다. 제주에서 많이 잡히는 자리돔은 구이나 조림, 젓갈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됐다.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고, 단백질과 칼슘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제주의 여름이 깊어간다. 거리를 달구던 태양이 모습을 감추면, 제주의 사람들은 하나둘 용천수가 나는 곳으로 모여든다. 물놀이를 끝낸 아이도,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도 지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차가운 물에 몸을 담가 긴 여름을 잊는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제주=글·사진 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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