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함 부수려던 불청객, 죽창 찔려가며 싸운 남자 [박만순의 기억전쟁2]

박만순 2024. 8. 1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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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에서 하루아침에 지서장으로... 죽음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긴 석수천씨 이야기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 투표소의 모습. 미 육군 소장자료.
ⓒ 미 육군=미 의회도서관
"이번에 누가 될 것 같은가?"
"거야, 류홍렬이가 될 게 뻔하지"

투표함을 나르는 이들이 한담을 나눴다. 그중 하나가 "이구영이 나왔으면 무조건 당선인데..." "당연하지"

그렇게 선거관리위원들이 얘기를 나누며 충북 제천군(현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투표함을 들고 면소재지인 황강리로 가는 길이었다. "꼼짝 마!" 복평리 골짜기에서 불청객들이 나타났다. 지게에 투표함을 진 이들은 황급히 지게를 벗어 던지고 달아났다. 그런데 인솔자 역할을 맡은 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지서장으로 특채된 이장

"네놈이 그 유명짜한 석가(石家)이구나!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불청객의 위협에 석수천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대여섯 명의 불청객이 석수천을 둘러싼 상황에서 한 명이 죽창을 내질렀다. 번개같이 피한 석수천이 죽창을 죈 청년의 면상을 주먹으로 갈겼다.

그렇게 근접전은 지속됐다. 평소 같으면 장정 열 명도 안 무서울 석수천은 시간이 갈수록 불리했다. 그가 아무리 힘이 장사라고 해도 상대방은 죽창과 몽둥이, 칼로 무장한 상태. 결국 30분이 채 안 돼 힘의 균형은 깨졌다. 석수천이 저수지에 풍덩 빠졌다.

불청객들은 석수천을 확인 사살하려고 했으나 시간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그들의 주목표는 석수천이 아니라 투표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투표용지를 소각시키기 위해 투표함을 부수려고 할 때였다.
 석수천 테러사건 상황도(1948.5.10).
ⓒ 네이버지도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닷!"

불청객인 빨치산들은 경찰이 나타난 줄 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자신들은 기껏해야 몽둥이와 창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경찰은 총을 갖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 발발 30분 만에 송계리에 있는 지서 경찰들이 출동하기는 불가능했다. 조금 전 지게를 벗어 던지고 도망간 이들이 멀리서 석수천의 몸뚱이가 만신창이가 돼 저수지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죽기 살기로 연극을 한 것이다.

저수지에 빠진 석수천을 지게 작대기를 이용해 건져냈다. 창에 찔린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팔다리도 성한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몸이 땅딸한 석수천이 상처로 인해 몸이 축 늘어지자 무게가 상당했다.

어렵사리 면소재지에 도착한 이들은 의원으로 부리나케 갔다. 석수천이 저승사자 앞까지 갔다가 이승으로 돌아온 때는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1948년 5월 10일 초저녁 때였다.

며칠 후 제천경찰서장이 병실을 찾았다. "석 이장.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소"라며 치켜세웠다. 석수천은 송계리 이장으로 선거관리위원을 맡아 목숨을 걸고 투표함을 지킨 것이다. 경찰서장이 병실을 다녀간 다음 날 송계리 이장 석수천은 한수지서장으로 특채됐다.

미군정 여론조사

미군정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을 공포했다. 이 기관은 미군정의 고문기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창설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누가 의원으로 적당한가를 물었다. 그런데 충북 제천에서는 이구영이 압도적으로 1위를 했다.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도 여론조사를 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2001).
▲ 의병활동 숭모비 이구영의 아버지(이주승)과 숙부(이조승) 창의(의병) 숭모비.
ⓒ 박만순
그렇다면 이구영은 어떤 인물이었나? 제천군 한수면 북노리 출신의 이구영(1920년생)은 의병의 후예이다. 그는 제천의 뼈대 있는 양반이자 부잣집 자제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이주승과 작은아버지 이조승은 구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해 의병장인 이강년의 문관과 유인석의 종사관을 각각 지냈었다.

이구영은 집안 친척뻘 되는 벽초 홍명희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한 그는 영창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다녔다. 해방 전에 월악동지회를 조직하고, 1943년도에는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명문 집안의 배경과 일제강점하 독립운동 경력으로 지역에서의 그의 대중적 지지도는 대단했다. 하지만 해방 후 미군정의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속에서 그의 정치적 날개는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불출마한 제헌의회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청풍면장 출신의 류홍렬(1907년생)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됐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출신 김종무 후보 표의 3배를 획득했다. 류홍렬은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 서기를 지냈던 이로 제천지역 사회운동에 특별한 이름이 나지는 않았던 인물이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은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미군정의 좌익운동 전면 탄압과 친일 경찰과 관료의 재등용, 치솟는 물가와 식량정책 실패, 분단국가 수립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선언했다.

그 결과 남로당은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충북 괴산의 김영규를 포함한 후보를 암살하기도 하고, 투표 당일에는 투표함을 소각하거나 선거관리위원을 암살하기도 했다. 충북 영동군 양강면 부면장이자 선거관리위원 배원규는 남로당원에 의해 1948년 5월 9일 암살됐다.

행운의 여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천 한수면 송계리 선거관리위원 석수천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더군다나 석수천은 빨치산을 토벌하고 마을을 경비하는 송계리 자위대장이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한수지서장에 특채된 석수천은 승승장구했다. 송계리 지서장을 거쳐 제천군 송학지서장을 맡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빨치산이 송학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적 열세 속에서 지서 안에 있던 경찰은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그런데 지서장 석수천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지서 돌담 위에 있던 타종대로 갔다. 빨치산의 침입이나 긴급상황에 대비해 종을 울리기 위한 타종대였다.

타종대에 올라간 그는 "1분대는 오전 10시 방향으로, 2분대는 오후 3시 방향으로!"라고 목청껏 외쳤다. 빨치산들은 지서 안에 경찰이 기껏해야 5~6명 있는 줄로 왔다가 당황했다. 실제 웬만한 지서에 정식 경찰은 5~6명에 불과했다. 다만 정식 경찰을 보조하기 위해 지역에서는 의용 경찰이 20~30명 정도 있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빨치산이 송학지서를 습격한 날 의용 경찰이 전부 소집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빨치산은 급하게 후퇴했다. 하지만 그날 지서에 의용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석수천 지서장이 기지를 발휘해 빨치산을 물리친 것이다.

그렇게 두 번의 위기 속에서 살아난 석수천에게 세 번째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석수천은 경북 문경의 외딴 오두막에 은거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송계리에 살던 이가 그 마을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그는 지방 좌익에게 석수천을 밀고했고, 한수면 분주소원들이 긴급출동해 석수천을 검거했다.

청주형무소 탈출
▲ 청주형무소 방화 6.25 당시 적대세력에 의해 방화된 청주형무소 모습.
ⓒ 진실화해위원회
석수천은 밧줄로 몸이 묶인 채 송계리로 끌려왔다. 당시 한수면 송계리에 살던 홍택주(1936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석수천은 자신이 묶여서 끌려가는 것이 부끄러운지 밧줄로 묶인 손에 나뭇잎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청주에서 온 인민군에게 넘겨졌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청주형무소에는 충북의 내로라하는 우익인사와 피난 가지 못한 경찰, 형무소 간수 등이 구금된 상태였다.

소위 악질반동(?)이 갇혀 있는 청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9월 들어서면서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 진작에 전선이 낙동강에서 고착화되면서 조만간 UN군이 반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랬기에 감방에 갇힌 이들 중에서도 일부 악질(?)들을 선별해 공개 처형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공개처형 장소는 형무소에서 가까우면서도 청주 한 가운데인 무심천으로 낙착되었다. 청주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9월 어느 날 석수천을 포함한 일단의 무리들이 뒷결박 당한 채 무심천 서문다리 아래로 이송됐다. 그들이 처형될 찰나에 윙하는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미군의 정찰기 소리였다. 사형 집행인들은 급하게 상황을 종료시키고 형무소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

추석을 이틀 앞둔 1950년 9월 24일 청주형무소에 구금돼 있던 이들이 뒷결박 당한 채 당산으로 끌려갔다. 사전에 파놓은 긴 구덩이에 앞에 서 있는 이들은 오금을 저렸다. 잠시 후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자신의 운명을 생각해서다.

그들의 예측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은 총알도 아까운지 쇠망치로 고개 숙인 이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뇌수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인간사냥은 이뤄졌다. 그다음날인 25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잠시 후에 형무소 안에서 싸한 휘발유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하며 웅성대는 사이 불길이 치솟았다.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한 인민군과 지방 좌익이 형무소 감방에 불을 지른 것이다. 감방 안에서는 아우성이 터졌다. 곧이어 구금돼 있던 이들이 쇠창살을 밀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속도에 비례해 쇠창살을 미는 힘도 거세졌다. '쿵' 하며 쇠창살이 쓰러졌다. 이날 불길 속에서 살아난 이는 김흥권을 포함한 200여 명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주지역 신교식 등 8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및 강제연행(납치) 사건>, 2008).

그런데 그곳에서 살아난 이중에는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의 석수천도 있었다. 그때까지 운명의 여신은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세 번만 석수천의 손을 들어줬다.

청주형무소에서 탈출한 그가 송계리에 돌아와서는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오랜 기간 병 앓이를 하다가 숨졌다.

다른 운명

죽음의 고비를 세 번 넘겼지만 병마와 힘겹게 싸우다가 죽은 석수천과는 다른 삶을 산 이도 있다. 송계리 대한청년단장 석대청은 1949년 1월 빨치산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돌로 머리를 타격당하고 그의 집이 불탔으나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빨치산 토벌대 활동을 지속했다.

살미면 무릉리 분소(살미지서 분소)장 안갑준은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다. 1947년도에 경찰에 입문한 그는 한국전쟁 전 충주군 살미면 무릉리에서 분소장을 하면서 빨치산 토벌에 공훈을 세웠다.

그 이후 그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경찰전문학교 교장과 충북도경찰국 국장을 거쳐 충남·북 도지사, 경기도지사, 전남·북 도지사를 했다. 그의 행운은 계속 이어져 제10~1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물론 관운과 벼슬(국회의원)운이 따랐다고 해서 꼭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석수천은 이들과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으며, 석수천과 맞서 싸운 빨치산들의 삶은 더욱 그랬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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