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 K-패션 만든 우영미의 뚝심…36년 만의 첫 '외도' [비크닉]
■ b.멘터리
「 브랜드에도 걸음걸이가 있다고 하죠. 이미지와 로고로 구성된 어떤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각인되기까지, 브랜드는 치열하게 ‘자기다움’을 직조합니다. 비크닉이 오늘날 중요한 소비 기호가 된 브랜드를 탐구합니다. 남다른 브랜드의 흥미로운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그 설레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
1980년대에 태어나,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한국 패션 브랜드가 있다. 바로 ‘솔리드옴므’다. 우영미 디자이너의 남성복 브랜드 솔리드옴므가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 팝업 스토어를 오픈했다.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스테판 쿡과의 협업 컬렉션을 출시하면서다.
요즘 패션 업계에선 흔한 ‘협업(콜라보레이션)’이라지만, 솔리드옴므에겐 브랜드 설립 36년만의 첫 협업으로 의미가 깊다. 우영미 디자이너는 “그동안 쌓아온 솔리드옴므의 확고한 정체성에 ‘충격파’를 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한국 패션 업계에서 그의 입지는 독보적이다. 대기업·수입 브랜드의 틈바구니에서 36년간 독립 패션 하우스를 유지해왔을 뿐 아니라, 브랜드를 찾아주는 현재 진행형 소비자가 있다는 점에서다. 지금도 길거리를 걷다 보면 ‘우영미’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20·30 남성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패션 업계에서, 근 40여년 간 일정한 ‘상업적 성공’을 만들어 온 셈이다.
지난해 브랜드 솔리드옴므·우영미를 보유한 패션 기업 쏠리드는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쏠리드의 2023년 매출은 1078억원으로 지난 2018년 456억원에서 5년 만에 2배 이상 불어났다. 많아야 수백억원대 매출에 머무르는 국내 독립 디자이너 하우스로서는 이례적 성과다. 지난 6일 서울 구의동 ‘하우스 우영미’에서 우영미 디자이너 겸 대표를 만나 좀더 이야기를 들어봤다.
모범생 솔리드옴므, 36년만 ‘외도’
붉은색 외관이 돋보이는 6층 규모 하우스 우영미의 1층은 솔리드옴므와 우영미의 지난 컬렉션이 빼곡히 들어찬 아카이브(가치 있는 기록물) 공간으로 꾸며졌다. 건물의 얼굴이자, 가장 노른자 위치를 옷들에 내준 셈이다. 이곳은 직원들이 일하다가 막히면 언제든 찾는 ‘도서관’이기도 하다.
지난 반 년간 이곳은 영국 듀오 디자이너 스테판 쿡과 제이크 버트의 놀이터였다. 우영미 디자이너는 “4년 전쯤 두 사람을 우연히 만나 패션에 관해 얘기하다가 서로 잘 맞겠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마케팅을 위해 하는 협업이 아니라 진짜 협업이란 걸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솔리드옴므는 실용적이면서도 정제된 스타일을 추구해 왔다. 곡선보다는 직선,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스타일이다. 영국 신예 디자이너 브랜드 스테판 쿡은 해체적 디자인과 스터드(금속 징), 업사이클링(새활용) 디자인이 특징인 실험적 스타일. 우 디자이너는 “이번 컬렉션은 솔리드옴므의 미니멀 감성에 영국적 위트가 더해진 격”이라며 “솔리드옴므의 새로운 자아이자 일종의 부캐”라고 전했다.
29세, 압구정에 겁 없이 연 부티크…. 톱 발라더도 줄섰다
이번 협업은 1988년 탄생해 지금까지 한국 남성 기성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온 솔리드옴므를 위한 하나의 ‘헌사’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번 컬렉션에서 솔리드옴므의 탄생 연도 ‘88’은 주요한 디자인 모티브가 됐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해. 패션 학교를 졸업하고 4~5년의 경력을 쌓던 29세 젊은 디자이너 우영미는 뭐가 됐든 ‘내 것’을 해보자며 브랜드를 만들었다. 당시 창업 준비에 바빠 올림픽이 열리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사실 돌이켜보면 의미심장한 시기다. 그는 “올림픽을 계기로 패션 시장이 커지면서 젊은 남성 소비자들에게도 패션 취향이라는 것이 막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회상했다. 곧 솔리드옴므 첫 압구정 매장은 이른바 ‘오렌지족’들의 성지가 됐다. 당시 해외 유학생이라는 부류가 처음 등장했고, 그들이 입을만한 거의 유일한 한국 브랜드였다.
솔리드옴므는 ‘우영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반영한 스타일이었다. 기존 한국 남성 기성복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당시 대중적 인기를 구가했던 신승훈·윤상 등 톱 발라드 가수들도 다퉈 솔리드옴므를 찾았다고 한다.
“당시 거의 모든 발라드 가수들이 무대에서 우리 옷을 입었어요. 매장에서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이 먼저 옷을 고르는 진풍경도 벌어졌죠. (웃음)”
‘우영미(WOOYOUNGMI)’로 확인한 ‘K-명품’의 가능성
한국 남성 패션의 태동기에 태어나 199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솔리드옴므는 IMF 외환위기에 휘청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한국 패션 시장에 전 세계 거의 모든 브랜드가 쏟아져 들어왔다. 솔리드옴므는 백화점 등 모든 유통이 수입 브랜드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짜는 가운데 한국 브랜드로 좁은 길을 개척해 가야 했다.
국내에서 고군분투를 하던 그는 곧 생각을 바꿨다. “좁은 시장에서 머물러있지 말고 ‘메인 게임’하는 곳으로 가자”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다. 패션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 진출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가 옆 나라 중국 시장으로 갈 때였다. 혼자서 파리에 가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얘기도 숱하게 들었다.
그렇게 2002년 프랑스 파리에서 또 다른 브랜드 ‘우영미’가 탄생했다. 진출 초기, “한국에도 하이패션(고급 패션)이 있냐”는 냉담한 현지 반응을 뒤로 하고 그는 뚝심 있게 20여년을 밀어붙였다. 2011년 한국인 최초로 파리의상조합 정회원 자격을 취득했고, 2020년에는 파리 ‘르 봉 마르셰’ 백화점 남성관 매출 1위 브랜드에 올랐다. K-팝이 흥행하고, 한국의 문화와 패션에 시선이 쏠리는 지금, 우영미는 한국에도 역사를 쌓아 온 하이패션이 있고, 유럽에서 대등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브랜드다.
“좋아하는 일이지만, 고통스러운 작업”
한 계절에도 수많은 브랜드가 뜨고 지는 패션 업계에서 근 40여년을 이어온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비결을 묻는 말에 그는 “우선은 천천히 했다”고 말했다. 단기간 매출 100억원 같은 급한 목표가 아니라 천천히 단계를 밟아왔다는 얘기다. 그는 “변화가 숙명인 패션 산업에서 브랜드 정체성을 지키면서 새롭고, 그러면서도 상업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때로는 무척 고통스럽다”면서도 “무엇보다 좋아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계속했던 것”이라고 했다.
회사 대표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동시에 하는 우영미 디자이너는 1년에 네 번의 컬렉션을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소화한다. 파리 컬렉션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다음 컬렉션은 뭘 하지”라고 생각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지금도 해외·대기업 등 외부 자본에 무수한 투자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그는 “나보다 더 브랜드를 잘 키울 사람이 있다면 언제나 열려있다”며 “목표 매출 같은 숫자로만 브랜드를 대할 게 아니라 아이 키우듯 천천히 성장시킬 수 있다면 마다치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도 비슷한 당부를 전했다. “세계가 한국에 대한 문화적 기대감이 큰데다 변화에 기민하고 에너지가 많은 한국 디자이너들의 잠재력은 충분합니다. 급하게 외형의 볼륨을 만들기보다 늦게 가더라도 브랜드 가치를 소중하게 쌓아간다면 세계 시장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요.”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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