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부부가 경북 의성서 일 냈다... 도시 직장인들 환호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 경북 의성 홉이든의 홉 밭 |
ⓒ 윤한샘 |
"지금은 수확 이후라 조금 듬성듬성하고 홉 송이도 작아요. 비가 온 뒤라 향도 약하네요. 홉 송이가 물을 많이 머금고 있거든요. 그래도 비가 그쳐 밭에 나올 수 있어 다행입니다."
홉 사이를 들어서는 장소영 대표의 목소리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폭우로 인해 홉 밭 방문이 취소될까 걱정하고 있었다. 의성으로 내려오는 내내 비가 왔던 참이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맥주의 영혼, 홉
홉 덩굴을 본 적은 있지만 대규모 홉 농장 방문은 처음이었다. 홉은 삼과 덩굴 식물로 최대 10m까지 자란다. 뿌리는 최대 2m까지 내리고 좌우로 뻗는 특성이 있다. 은행나무처럼 암·수나무가 있으며 암나무에 달린 홉 송이가 맥주의 재료로 사용된다. 한 번 심으면 줄기를 베어내도 계속 싹이 나와 농부 입장에선 매번 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릴 필요가 없는 기특한 작물이다.
▲ 노란색 부분이 루풀린이다. 맥주에 향미를 창조한다. |
ⓒ 윤한샘 |
이렇게 중요한 홉이지만 국산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맥주 양조에 사용되는 홉 대부분은 수입되고 있다. 라거에 들어가는 전통적인 홉은 독일, 체코산이며 인디아 페일 에일(IPA) 같은 크래프트 맥주에는 주로 미국과 뉴질랜드 홉이 사용된다. 그렇다고 아시아에 홉이 없는 건 아니다. 중국은 세계 최대 홉 생산국이며 일본도 소라치 에이스라는 훌륭한 자생종 홉을 보유하고 있다.
북위 37도에 위치한 한국도 홉이 잘 자라는 나라다. 그런데 상업용 홉은 찾기 힘들다. 1990년대 후반까지 국산 홉을 키우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경제성이 발목을 잡았다.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며 안정된 품질과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수입 홉이 시장을 점령했다. 사실 이는 홉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산 농산물이 직면한 현실이었다. 식량작물과 몇몇 특수작물을 제외하고 수입 농산물이 원재료 시장을 차지했다. 막걸리와 소주도 수입 재료로 만드는데, 맥주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 홉이든을 방문한 한국맥주문화협회원들. 제일 왼쪽이 김정원 대표, 제일 오른쪽이 장소영 대표. |
ⓒ 윤한샘 |
"남편과 퇴사를 하고 자전거 여행을 했어요. 3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녔죠. 한국에 돌아와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데 마침 수제맥주 붐이 일었던 거죠. 사실 저는 맥주를 아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주위에 있는 지인들이 맥주에 빠져 있었죠.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좋아서 시작한 거 같아요."
경북 의성에 농업법인 '홉이든'을 설립한 장소영, 김정원 부부는 2018년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홉 농사에 뛰어들었다. 귀농지로 의성을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장 대표의 고향이었고 초보 농사꾼을 도와줄 든든한 부모님이 계셨다.
의성은 홉 농사에 적합했지만 기후와 토양을 타는 품종도 있었다. 다행히 캐스케이드와 콜럼버스 홉처럼 크래프트 맥주에 두루 사용되는 품종이 살아남았다. 초보 농사꾼 생활이 만만치 않았지만 다른 홉 농가의 지원과 부모님의 도움으로 조금씩 홉을 수확할 수 있었다.
▲ 양조 전 홉을 수확한 모습 |
ⓒ 윤한샘 |
그럼에도 장 대표는 국산 홉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홉 팰릿 장비 도입을 준비하는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홉을 접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했다.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홉은 생경한 식물이었다. 농장을 견학하고 직접 수확한 홉으로 맥주를 만드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쇼미더 홉이 펼쳐질 홉이든 홉 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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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사로서 생 홉 양조가 궁금했다. 상업 양조장에서 생 홉을 맥주에 넣을 기회는 거의 없다. 호피 홀리데이 양조 체험을 지나친다면 후회할 게 분명했다. 주택을 개조한 호피 홀리데이는 작지만 힙한 기운이 가득했다. 초록빛 만발한 마당 한 구석에 벽면을 채운 홉 송이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맥아 냄새가 은근했다. 왼쪽에는 생맥주를 판매하는 시설이 있었고 중간에는 숙성 중인 맥주가 쌓여 있는 방이 보였다. 오른쪽에는 홈브루잉 시설과 긴 나무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양조는 오늘 넣을 홉을 직접 따는 것에서 시작했다. 테이블은 오전에 장 대표가 수확해놓은 다섯 줄기의 홉으로 꽉 차 있었다. 캐스케이드, 크리스털, 캐시미어, 치눅, 콜럼버스, 품종이 모두 달랐다. 굵은 실처럼 꼬여 있는 줄기는 까슬까슬했고 끝이 뾰족한 이파리는 톱니처럼 보였다. 중간중간 홉 송이가 없었다면 포도라고 생각했을 것 같았다.
▲ 홉 품종에 따라 홉 송이의 모양이 다르다. |
ⓒ 윤한샘 |
액화 질소를 부은 홉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다음 할 일은 열심히 부수는 것. 곱게 분쇄된 홉은 맥즙 속으로 들어가 맥주의 쓴맛과 향이 된다. 보통 생 홉이 들어간 맥주는 풀 향이 도드라지는데,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너무 궁금했다.
양조와 투어를 마친 후, 장 대표에게 미래를 물어봤다. 그는 홉 문화를 이야기했다. 천천히 차곡차곡 국산 홉을 알리는 일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곧 도입할 팰릿 장비로 품질을 안정화 시키고 수입 홉에 없는 신선함으로 승부를 보겠다며 싱긋 웃었다.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일개 기업이 혼자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보였지만 왠지 두 사람은 해낼 것 같았다. 미소 띤 얼굴로 국산 홉을 자랑하는 부부를 보며 '드리머'라는 단어가 떠 올랐다. 꿈꾸는 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우리도 한국만의 홉 품종을 가질 수 있을까? 한반도의 떼루아를 품은 홉이 나오는 그날이 기대된다. 그때가 국산 홉이든 진짜 한국 맥주가 세상에 태어나는 날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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