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의 그 이름... 이봉창 바지에 폭탄 주머니 달아줬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히로히토 일왕(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질 계획이었던 이봉창 의사는 1931년 12월 17일 백범 김구에게 고별한 뒤 상하이를 출발해 이틀 뒤 고베항에 상륙했다. 홍인근 국제한국연구원 연구위원이 일제 조사 기록을 토대로 <이봉창 평전>에서 설명한 내용에 따르면, 이봉창의 두 허벅지에는 비단으로 된 수류탄 주머니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수류탄을 넣은 두 주머니의 끈을 배꼽 부근에서 묶어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그런 상태로 중국에서 일본까지 갔으니,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얼마나 신경을 썼을지 헤아릴 수 있다.
만약 주머니와 끈이 부실했다면, 이봉창은 히로히토 앞에 가기도 전에 수류탄을 땅바닥에 떨어트렸을 수도 있다. 주머니와 끈이 잘 만들어지고 잘 연결됐기에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 독립운동가 이화림. 영화 <파묘>의 주인공 이름 '이화림'은 그에게서 비롯됐다. |
ⓒ 자료사진 |
회고록에 따르면, 55세의 김구와 30세의 이봉창과 26세의 이화림이 히로히토 처단 방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폭탄을 들고 갈 것인가의 문제인데 무척 쉽지가 않구나"라는 한탄이 김구에게서 나왔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가 폐기된 뒤 이봉창이 손가락으로 자기 몸을 가리키며 "폭탄을 바짓가랑이 주머니에 넣고 꿰매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두 남자와 함께 있다가 이 상황에 맞닥트린 이화림은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를 향해 김구는 "그거 좋은 방법"이라며 "그렇게 만들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이봉창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구체적인 디자인을 설명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천 조각을 사서 밤새워 이봉창이 말한 양식으로 바짓가랑이 주머니를 만들었다"고 이화림은 회고했다. 이 주머니들은 다음날 김구에게 전달됐고, "이봉창도 매우 만족"했다는 이야기가 김구를 통해 이화림에게 전해졌다. 이봉창은 그 주머니로 도쿄까지 수류탄을 실어날라서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앞에 나섰다.
31세가 된 이봉창이 도쿄에서 의거를 일으킨 데 이어,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24세의 윤봉길이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 의사를 재차 표시했다. 김구가 기획하고 준비한 이 두 의거는 그가 국제적 인물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1920년대 중반 이후로 침체됐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 1월 28일 상하이사변을 도발해 이 도시를 점령했다. 그런 뒤 전승 축하식 겸 천장절(일왕 생일)을 4월 29일 훙커우공원에서 거행하려 했다. 이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응징한 것이 윤봉길 의거였다. 이화림은 이 의거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회고록은 이렇게 말한다.
"윤봉길과 나는 미리 훙커우공원에 가 한번 정탐을 하고 구체적인 노선과 일군의 검열 지점 등을 찾아보았다. 동시에,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사진과 일장기 한 장을 샀다."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직후에 윤봉길은 자신을 향해 떼 지어 달려오는 헌병들에게 붙들린 상태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얻어맞았다. 김구가 세운 애초 계획은 이화림이 준비 단계뿐 아니라 이 단계에서도 윤봉길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화림과 윤봉길이 부부로 위장해 현장에 진입해 폭탄을 던지는 것이 김구의 원래 구상이었다.
1991년 12월 7일 자 <조선일보> 13면의 이화림 특집은 "사전에 김구 선생으로부터 윤 의사와 부부 사이로 위장해 현장에 접근하도록 지시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이 계획대로 실행돼 윤봉길이 만세를 외칠 때 이화림도 그 옆에 있었다면, 역사적인 이 사건의 명칭은 윤봉길·이화림 의거로 알려지게 됐을 것이다.
그런데 거사 직전, 김구의 생각이 바뀌었다. 위 기사는 김구가 "두 사람을 모두 잃을 수는 없다"며 윤봉길만 훙커우공원에 보냈다고 설명한다.
회고록에서 이화림은 4월 29일 이전의 몇 날 동안 밤잠을 설쳤노라고 말했다. 너무나 설렜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상하이에 와서 보아왔던 많은 애국지사의 영웅적인 업적은 나를 매우 고무시켰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자료를 본 이후 나는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며 반복해서 생각을 했다. 만일 내가 일본의 중요 우두머리를 사살할 기회를 갖는다면 정말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기회가 지금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의 꿈이 이제 곧 실현될 것 같아 매우 흥분되었다."
위 기사와 회고록에서 나타나듯이 우리가 윤봉길 의거로 알고 있는 사건은 원래 이화림·윤봉길 의거였다. 그랬던 것이 거사 직전에 김구의 작전 변경에 따라 윤봉길 단독 의거로 바뀌었던 것이다.
▲ 책 <이화림 회고록> 겉표지 |
ⓒ 차이나하우스 |
1930년에 상하이로 망명해 이듬해부터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정탐 임부와 특수작전을 수행한 그는 윤봉길 의거 뒤에 김구와 결별하고 그 뒤 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화북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약했다. 주시경의 후계자이자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될 김두봉과 많은 시간을 함께 활동했다.
김구를 떠난 뒤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법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항일투쟁기에 조선의용군 병원에서 근무한 그는 해방 2년 뒤인 1947년부터 중국 다롄(대련)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국장 같은 중국 공직을 맡기도 했다.
다른 조직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외의 다른 항일투쟁도 김구와 함께 수행했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명단에 나오지 않는다. 본명 이춘실과 가명 이동해도 마찬가지다. 혹시나 해서 '리화림'으로 검색해도 마찬가지다.
그가 이봉창 의거의 조력자이고 윤봉길 의거의 핵심 참여자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그런데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기에는 김구의 영향도 작용했다. 김구는 자신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두 사건을 도운 이화림을 <백범일지>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김구가 이렇게 한 이유와 관련해 위 이선이 논문은 언론인 겸 역사저술가 임기상의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에 실린 아래의 해석을 참고용으로 제시한다.
"<백범일지>에 이화림 이야기가 빠진 것은 그녀에 대한 김구 선생의 인간적 서운함이 작용한 것 같다. 백범에게 있어 비서이자 한국애국단의 핵심이었던 이화림의 존재는 컸다. 이화림은 재정난을 겪고 있는 임시정부를 위해 나물 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활동 경비를 지원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밀정 처단이나 연락 활동 등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김구 선생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던 그녀가 테러만으로는 조선의 해방을 이룰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백범의 만류를 뿌리치고 혁명의 기지 광저우로 떠났으니 백범의 좌절이 얼마나 컸을까? 더구나 이화림이 백범이 싫어하는 좌익 계열의 항일운동기지로 갔다는 점도 이화림을 회고록에서 지우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이화림이란 존재는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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