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연산군 때 태어나

김삼웅 2024. 8. 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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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 4] 그에게 조광조와 숙부의 죽임은 절망적이었다

[김삼웅 기자]

 정암 조광조의 영정.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유배지의 영정각에 모셔져 있다.
ⓒ 이돈삼
남명이 태어나고 성장할 때는 폭군의 대명사격인 연산군 시절이다.

훈구세력과 사림이 서로 대립하였다. 1504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의 억울함을 푼다며 성종의 후궁을 궁궐에서 때려 죽이고, 성종 때 폐비의 죽음을 주장한 자들과 이를 반대하지 않는 자들을 단죄하였다. 갑자사화이다.

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궁궐로 뽑아들인 기생이 1만 명에 이르렀다. 이 기생들을 '흥청(興淸)'이라 했는데, 뒷날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경연을 폐지하고 홍문관과 사간원을 폐지했으며 상소나 신문고도 금지시켰다.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투서가 계속되자 훈민정음의 교육과 사용, 한글 서적을 모아 불태웠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사림세력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세력과 경쟁을 해야했다. 사림파의 득세에 위기를 느낀 훈구파는 대사헌이 된 조광조를 모략하여 귀양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이는 등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중종은 훈구파를 다시 불러들여 사림세력을 제거하였다.

남명의 아버지 조언형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판교로 재임 때 기묘사화로 좌천되고, 숙부 조언명은 이조좌랑이었으나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였다. 강직한 사림파에 속했다.

창평 조씨는 고려 태조 이래 현달하여 누대에 걸쳐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조민수가 위화도회군에 가담하여 권문세가가 되었으나 얼마 후 이성계에게 숙청당하여 가세가 기울었다. 조선 초기에 증조할아버지 조안습이 개경에서 경상도 삼가면 토동으로 낙향했다. 조안습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고, 아버지 조언형이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판교가 되었으니 기묘사화로 좌천되었음은 앞에서 기록한 대로이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남긴 절명시다. 화순군 능주면 조광조 유배지에 있다.
ⓒ 이돈삼
남명은 이런 가계의 혈통을 타고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지켜보며 성장했다. 타락한 권력에 대한 혐오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남명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고 성품이 강건정중하여 어른과 같았다 한다. 할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으로 가르침을 받았는데 배우는 것 마다 모두 암기했다고 한다. 7살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스스로 열심히 익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질문하여 이해한 다음에 그만두었다.

그런데 9살에 병이 위독하여 어머니가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어찌 공연한 일이겠습니까.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주었을테니 어찌 일찍 죽을까 봐 걱정할 일이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주석 1)

5살 때까지 토동의 외가에서 자라던 남명은 아버지가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하여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웠다. 소년기에 이윤경·이준경 형제, 이환 등과 죽마고우로 사귀고, 아버지가 서천군수로 부임하자 따라가서 천문·지리·의방·수학·진법·궁마 등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다. 이 시기 자신의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지새웠다는 일화가 전한다.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18살 때 서울로 돌아와 성수심과 성운 종형제를 만남으로써 커다란 정신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그들의 의기가 활달하고 그들의 정신경지가 고초하여 그들의 문장이 방결청아 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이왕의 짙었던 속기를 떨쳐 버리고 보다 높고 넓고 깊은 인생의 경지를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유서(儒書) 외에 노장(老莊)과 불서(佛書)를 섭렵하기도 하였다. (주석 2)
 면암 최익현이 세운 정암 조광조 추모비. 양팽손이 처음 조광조의 무덤을 쓴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이른바 조대감골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남명은 남달리 총명한 두뇌를 갖고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각종 서책을 읽어 소화하고 20살에 생원·진사 양과에 1, 2등으로 급제하였다. 다음 해에 실시된 생진회시에는 나가지 않고 문과회사에서는 낙방하였다. 소과(小科)는 일시적인 영달을 위한 것이요 출사의 길이 아니라 해서 소과는 포기하고 문과만 응시한 것이다.

"남명은 좌류문(在柳文)을 좋아하고 고문(古文)에 능하여 시문이 아닌 고문으로 시권(詩卷)을 써서 시관들을 놀라게 하고 그 글은 사람들이 전용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을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숙부인 언병가가 멸문의 화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 (주석 3)

꿈이 많고 박학다식했던 그에게 조광조와 숙부의 죽임은 절망적이었다. 기묘사화는 모처럼 작동하기 시작한 사림정치의 이상을 송두리째 제거하는 정치폭력이었다. 그리고 다시 조선사회는 고루한 훈구파의 독무대가 차려졌다.

훈구파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이후에 수 차례에 걸쳐 책봉된 250여 명의 공신 그룹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세조는 난국을 헤쳐가기 위해 공신그룹 뿐만 아니라 종실 세력과 지방의 사림들을 끌어들였다. 여기에 세 세력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단종복위 운동이나 남이(南怡)의 옥으로 종실세력이 제거되고 4대사화로 사림세력이 제거되었다. (주석 4)

사화기 말엽에 해당하는 그의 생존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 혼탁한 시기였다. 연산군의 방탕, 중종기 이후 훈구 관료의 사림에 대한 음해, 외척들의 발호로 인한 사림의 피화(被禍) 등이 당시 상황을 탁박하게 하던 시기였다. 남명은 그러한 시대분위기에서 명리추구 의식을 떨쳐 버리고 지리산 자락에서 속진에 오염되지 않은 채, 학문 연마와 후진 교육에 일생을 바침으로써 당대의 사림계로부터 숭앙을 받아왔다. (주석 5)

주석
1> 이성무, <남명 조식의 생애와 사상>, <남명학보> 창간호, 78쪽, 남명학회, 2002.
2> <남명조식선생 행장 및 사적>,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논총(제1집)>, 362쪽, 1988.(이후 <행장 및 사적> 표기)
3> 앞의 책, 362쪽.
4> 이성무, 앞의 책, 87쪽.
5> 윤사순, <천인관계에 대한 남명의 사상>, <남명학보>, 창간호, 20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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