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논쟁으로 당이 쪼개졌다…100년 동안 치고받은 대동법

유성운 2024. 8. 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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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수염세를 집행한 표트르 대제를 묘사한 그림

역사에서 세금 논쟁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17~19세기 창문에 세금을 거둔 영국의 ‘창문세’나 17세기 전근대적 분위기를 일신하겠다면서 턱수염에 부과한 러시아의 ‘수염세’까지, 세금 개편엔 늘 많은 논쟁과 저항이 뒤따랐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중기부터 온 나라가 가장 달아오르게 만든 이슈 중 하나가 ‘대동법(大同法)’이라고 불린 세금 논쟁이었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대동법에 대해서는 17세기만 해도 약 400여건의 의견이 나왔을 정도로 당대 지식인과 관료들이 모두 뛰어든 주제였습니다.

조선 시대 세제는 조용조(租庸調) 시스템이었습니다. 조(租)는 토지에 붙이는 세금, 용(庸)은 노동력 수취, 조(調)는 지방 특산품(공물)을 바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완성되어 동아시아 국가들에 널리 쓰였습니다.

이중 논란이 많은 것이 조(調)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중앙정부와 왕실은 대략 200여개의 항목 이상의 공물과 진상품을 매년 소비했는데, 필요할 때마다 1년에 수차례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농민 입장에서는 생업을 하면서 특산품 구하러 다니는 것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닌 데다, 중간에 관리나 상인들의 농간이 심했습니다. 방납(防納)이라고 해서 농민들로부터 대가를 받고 공물을 대신 납부해주는 제도가 성행했고, 이 과정에서 아전이나 상인들은 실제 가격보다 수 배 이상을 요구하기 일쑤였던 것이죠.

이런 폐단을 부추긴 것이 점퇴(點退)라는 제도입니다. 지방에서 애써 구한 공물을 한양의 중앙정부에서 품질이 나쁘다며 접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면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농민 입장에서는 몇 배의 가격을 주더라도 차라리 방납을 택하는 편이 안전했습니다. 아전과 상인, 그리고 중앙 관료들이 이익을 얻기 위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던 셈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기념비`.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에게 균역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했다. [중앙포토]

이 때문에 조선 중기부터 율곡 이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공물변통(貢物變通) 같은 공물 수취 세제 시스템 개편을 주장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공물을 현물이 아닌 쌀로 납부하도록 하는 공물작미(貢物作米)인데, 대동법이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고을마다 납세자들이 가진 땅의 크기에 비례해 쌀을 납부하도록 하고, 중앙정부가 이 쌀로 시장에서 현물을 사게끔 하는 것이죠.

이 논쟁은 조선 인조-효종 대에 격화됐는데, 이를 놓고 당대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찬성파인 한당(漢黨·관료 중심)과 반대파인 산당(山黨·학자 중심)으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한당의 한(漢)은 한양(서울)을 의미합니다. 김육, 조익 등 한양 일대에 거주하는 엘리트 관료 출신들은 대동법을 실시하면 중간업자들의 농간을 막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세수는 오히려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산당은 충청 일대를 중심으로 지방에 있는 유림이나 대학자들이 중심이 됐습니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부르짖은 김상헌을 추종하는 김집, 송시열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대동법 취지엔 공감하지만, 경기도 외 지방에선 ▶유통 인프라 ▶수송선 침몰 위험 ▶지방 부호의 반발 등 실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특히 대동법 시행 논의가 알려지자 가장 반대가 심했던 것은 당시 지주가 많은 호남이었습니다. 대동법이 논의부터 전국 시행까지 약 100여년의 세월이 걸린 것도 대토지를 소유한 지방 부호의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이 지난달 시작한 기획전시회 〈조행일록, 서해바다로 나라 곡식을 옮기다〉보습. 조선시대 나라를 움직이는 근간이었던 세금을 걷는 일 가운데 곡식을 배로 옮겼던 ‘조운(漕運)’ 과정을 재조명했다. 송봉근 기자

그럼에도 대동법이 시행될 수 있었던 데는 크게 2가지 배경이 작용했습니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기후악화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조선 지도층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여기에 17세기 내내 소빙기(小氷期)로 기후 상황이 악화하면서 농산물 생산도 큰 타격을 입자 민심이 급속도로 악화한 것이죠.

위기에 빠진 조선 정부는 민간의 세금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카드를 꺼내 들어 성난 민심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대동법이 17세기 후반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될 수 있었던 요인입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5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동료으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정치권에서 여야가 금투세(금융투자소득세)를 놓고 논쟁이 한창입니다. 여당은 전격적인 폐지를 주장하는 반면, 야당은 사정이 간단치 않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초 내년도 1월 시행을 추진했지만, 반대가 더 많은 여론에 부딪혀 고민이 큽니다. 대선을 꿈꾸는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는 금투세 공제 한도를 5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상향하자는 카드를 꺼낸 상황입니다.

조선 때 서인 세력이 대동법을 놓고 한당과 산당으로 갈렸던 것처럼 민주당도 금투세를 놓고 친명계(유예론)와 친문·86그룹(시행론)으로 나뉘는 분위기입니다. 어느 쪽이 승리하든 정책을 놓고 경쟁한다는 점에서 오랜만에 보는 정치권의 건강한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친명이냐, 아니냐를 놓고 다투는 것보다는 국가에 훨씬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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