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오면 지하차도에 다시 갇혀요”… ‘침수 트라우마’에 떠는 사람들

성윤수,김민경 2024. 8. 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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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15일 미호천 제방 유실로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가 완전히 침수된 모습. 이틑날에서야 버스 등 탑승객 피해 확인을 위한 구조작업이 시도됐다.(왼쪽) 오른쪽은 침수 이틀 뒤인 17일 새벽 물이 가득찬 지하차도 내 인명수색을 위해 해양경찰 대원들이 걸어 들어가는 모습. 연합뉴스


A씨는 지난 7월 쏟아진 집중호우로 가족을 잃었다. 한집에 있던 남편이 토사에 휩쓸려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당시 A씨가 살던 지역에는 시간당 약 100㎜가 넘는 폭우가 퍼부었다. A씨는 비에 대한 공포감과 함께 가족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A씨는 “쾅 소리에 일어나 보니 다 쓸려가고 주변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칠흑 같은 밤에 안경도, 핸드폰도 못 찾고 무작정 엉금엉금 기어나갔는데 아주 멀리서 (남편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그날을 떠올렸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밤사이 폭우가 내렸던 지난달 10일 대전 서구 정뱅이마을에서 한 주민이 홍수 피해를 입은 마을을 살펴보고 있다. 대전=윤웅 기자


수마(水魔)는 A씨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꿔놨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빗소리가 이젠 견디기 힘든 소리가 됐다. 비 내리는 소리에 남편이 외치던 ‘살려달라’는 소리가 겹쳐 들린다. 최근 장마철에는 집 안 모든 커튼을 치고 지내야 할 정도였다.

사고 직후 트라우마 상담을 받기 시작한 A씨는 현재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그래도 비와 물에 관련된 트라우마는 남아있다. A씨는 트라우마 상담에서 “빗소리가 싫을 뿐 아니라 환청까지 들린다. 이제는 비가 오면 밖에 못 나갈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7월 15일 오전 8시 30분쯤 충북 청주시 오송지하차도가 침수 되기 직전 지하차도를 지나가던 차량 앞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모습이 포착된 영상(왼쪽). 오른쪽은 20여초 뒤 지하차도 출구에서 겨우 빠져나왔온 상황. 이미 거센 물길로 전진하기 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유튜브 '손오공' 캡처


시간당 수십~수백㎜의 비가 쏟아지는 이른바 ‘극한 호우’가 잦아지면서 폭우로 일상을 잃는 피해와 함께 장기적인 트라우마에 대한 관리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실제 기상청이 발간한 ‘2022년 장마 백서’를 보면 시간당 30㎜ 이상의 집중호우 발생 빈도는 과거(1970~1990) 20년에 비해 최근 20년(2001~2020년)간 20% 이상 증가했다.

이런 가운데 호우 및 풍수해를 겪은 재난 피해자들이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사례도 매년 1000건을 넘어서고 있다. 9일 국민일보가 행정안전부 산하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에서 제공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947건이었던 호우 관련 트라우마 상담 건수는 2022년 1084건에 이어 2023년엔 1225건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 서울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극한 호우가 내린 영향이 크다. 올해는 7월 기준으로 이미 986건의 상담이 이뤄졌다. 기록적인 집중호우 피해가 발생했던 2020년엔 트라우마 상담 건수가 1225건에 달했다. 이들 사례는 호우·홍수 등 관련 상담만 집계한 것으로, 태풍으로 인한 트라우마 상담까지 포함하면 수치는 크게 늘어난다.

이정숙 서울시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상담가가 침수 피해 트라우마를 겪는 내담자를 상담하고 있다. 본인 제공


특히 침수 트라우마는 매년 장마철이 불안을 자극하는 ‘트리거(방아쇠)’가 될 수 있어 장기적인 관리가 중요하다. 일상적인 비에도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들로서는 비가 내리는 상황 자체를 피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14명이 숨진 ‘오송 지하차도 참사’ 생존자 이모(21)씨는 참사 후 1년이 지난 지금도 비가 내리는 밤이면 잠을 못 이룬다. 지난해 7월 15일 이씨는 여느 때와 같던 출근길에 피해를 겪었다. 그는 “지하차도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옆에서 콸콸 쏟아지더니 차가 붕 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충북 청주에 사흘간 약 500㎜의 집중호우가 쏟아졌던 기록적 폭우에 부실했던 미호강 제방이 무너지면서 옆에 있던 지하차도로 순식간에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씨는 열려있던 차 창문으로 겨우 빠져 나와 차 천장에 달린 안테나 볼을 잡고 버텼다. 그러나 앞에 있던 차량이 물살에 떠오르며 이씨의 차 앞 범퍼를 눌렀고, 이씨 차량은 완전히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씨는 지하차도 안에 찬 흙탕물에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나무판자를 붙잡고 물살을 따라 밖으로 탈출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악몽 같았던 그 날 이후 이씨는 비가 오는 날이면 불안증을 겪는다. 특히 연일 비가 내리는 장마철엔 참사 당시 상황이 계속 떠올라 잠 못드는 날들이 이어진다. 이씨는 “침수 피해 기사만 봐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때가 생각나면서 속이 답답하고 울렁거린다”라면서 “비 오는 날이면 집 주위에 있는 하천을 보고도 ‘다른 곳도 이렇게 물이 찼을까’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빗소리 자체를 안 듣고 싶어 음악을 크게 틀어보지만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씨는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하루 네 알씩 불안감을 낮추고 불면을 완화하는 약을 먹는다. 비가 내려 긴장감이 더 커지면, 그럴 때를 대비해 처방받은 ‘필요시 약’을 추가로 한 알 더 먹는다.

참사 이후 바닷가나 워터파크도 꺼리게 된 이씨는 침수 트라우마의 장기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해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물 자체가 무서워지고 피하게 된다”며 “비라는 게 아예 안 올 수도 없는 건데 (치료를 받지 않으면) 매번 날씨에 대해 긴장과 불안감을 가진 채 지내게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심리 지원이 꾸준히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는 “침수 피해는 일상적 공간에서 벌어진다. 그렇기에 상실감과 무력감이 다른 트라우마에 비해 심하다”며 “매년 돌아오는 계절이 트리거가 돼 장마철마다 ‘애니버서리 리액션’(특정 기념일에 피해자가 겪는 심리적 증상)이 반복된다는 것도 침수 트라우마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고 짚었다.

이정숙 서울시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상담가도 “수해는 (집, 가족 등) 모든 걸 다 쓸어간다. 그래서 수해 피해자들은 몸도 마음도 경제적으로도 다 힘들다”면서 “이들이 털어놓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피해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올해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집중호우 피해자 트라우마 관리에 나섰다.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트라우마센터는 재난 심리지원 담당 인력 직무교육 과정에 집중호우 대응 교육을 신설, 지난달 12일 첫 교육을 진행했다. 센터 관계자는 “침수 피해 트라우마에 대한 대응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교육 과정을 신설했다. 오는 11월 예정된 교육에 이어 정기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성윤수 기자 tigris@kmib.co.kr
김민경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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