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보도의 수준... 대통령님이 믿을까 걱정됩니다 [대통령을 위한 반도체 특별과외]
[이봉렬 기자]
[기사 수정 : 8월 19일 오전 10시 50분]
<대통령을 위한 반도체 특별과외> 연재를 시작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고, 횟수로도 이 글이 서른여덟 번째가 됩니다. 그동안 기사를 쓰면서 대통령님 입장에서 듣기 싫을 만한 이야기도 많이 했지만, 그 모든 게 대통령님이 반도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해서 우리 반도체 산업 관련 정책을 올바로 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반도체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내놓는 매체들이 있어서 그간 대통령님과 함께해 온 반도체 과외 공부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그런 보도가 공영방송 KBS나 자칭 '1등 신문'이라는< 조선일보> 같은 매체에서 나와 사태가 좀 더 심각합니다. 날이 갈수록 격화되는 국가 간 반도체 경쟁 가운데 대통령님의 눈을 어지럽히는 잘못된 보도는 국익을 위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겁니다.
시작하기 전에 지금껏 해 왔던 반도체 특별과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용어 몇 개를 복습하겠습니다. 웨이퍼(Wafer)는 반도체 집적회로 여러 개를 한 번에 제작하기 위한 실리콘 소재의 원판입니다. 대통령님도 몇 번 만져 봤으니 익숙하죠?
그 웨이퍼 위에 그려져 있는 집적회로 하나하나를 제조 과정에서는 다이(Die)라고 부르고, 그게 완성되어 낱개로 잘라내면 칩(Chip)이라고 부릅니다. 다이와 칩은 따로 구분하지 않고 섞어 쓰기도 합니다. 너무 쉬운 거 아니냐고요? 이것을 간과하고 반도체 관련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있어서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겁니다.
▲ KBS 2TV 경제콘서트 보도 장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 KBS 보도화면 |
"자, 이 사진 기억하십니까. 미국 반도체 '부흥'을 외치며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기판을 들고 흔들던 모습. 이게 벌써 3년 전인데요. 반도체 혁명은 참 끝이 없습니다. 이 기판도 기술 혁명이 코 앞에 와 있다고 합니다. 반도체 기판은 그림으로 치면 스케치북 같은 겁니다. 얇고 평평한 기판 위에 반도체 회로를 그려 넣으면, 작업 시작! 그런데, 이 기판은 뭐로 만들까요. 지금은 실리콘이 대세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들고 있던 건 반도체 칩 제조의 기본 소재가 되는 웨이퍼이며, 실리콘으로 만든 게 맞습니다. 문제는 진행자의 다음 발언입니다.
"실리콘보다 몇 수 위가 바로 '유리'입니다. 지금 보시는 게 시범 생산 중인 '유리 기판'입니다. 실제 훨씬 투명한 모습이죠? 표면이 매끄러워서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고, 무엇보다 전기를 덜 쓰면서 속도는 빠릅니다."
반도체 칩을 만드는 실리콘 웨이퍼 이야기를 하다가 실리콘 보다 더 발전된 소재가 유리라며 느닷없이 '유리기판' 이야기로 건너뛰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현재 주목 받고 있는 '유리기판'은 기존의 실리콘 소재를 대신해서 반도체 칩을 만드는 데 쓰는 게 아닙니다. 실리콘 웨이퍼로 만든 칩을 그 위에 올려서 다른 칩과 신호를 주고받기 위해 만든 판을 유리로 만든다는 이야기인 거죠.
웨이퍼의 소재는 지금도 실리콘이 대세이며, 실리콘카바이드 같은 혼합물 반도체 소재가 전력반도체 등 특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입니다.
반면에 반도체 칩 조립을 위한 기판은 에폭시 수지 등 유기화합물 기판을 많이 쓰고, 고성능 칩을 만들 때는 실리콘을 쓰기도 하는데, 이걸 유리로 대체하려고 많은 투자가 이어지는 중입니다.
▲ KBS 2TV 경제콘서트 보도 장면 중 앱솔릭스에서 만드는 유리기판의 모습. 이 유리기판은 실리콘 웨이퍼를 대신해서 반도체 칩을 만드는 게 아니라 반도체 칩 조립용 기판입니다. |
ⓒ KBS 보도화면 |
이번에는 8월 초에 나온 <조선일보>의 반도체 관련 기사를 하나 볼까요? <엔비디아 '블랙웰', 설계 결함으로 생산 지연>이라는 제목의 기사 본문 중에 결함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2일 IT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소식통을 인용해 엔비디아의 차기 AI반도체 '블랙웰' 제품이 설계상의 결함으로 생산 일정이 3개월가량 늦어지게 됐다고 보도했다. 디인포메이션은 "B(블랙웰)200 칩이 두 개 탑재돼 있는 수퍼칩 'GB200′에서 B200 두 개를 연결하는 실리콘 조각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고 전했다.>
낯선 용어들이 많아서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죠?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블랙웰은 엔비디아의 GPU 아키텍처의 이름입니다. 아키텍처란 칩 내부의 물리적 배치와 칩 구동을 위한 명령어 같은 걸 정리한 종합 설계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아키텍처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칩을 만들어 냅니다. 블랙웰 이전의 아키텍처는 호퍼였고, 호퍼를 이용한 H100과 H200이 지금 가장 널리 쓰이는 AI칩입니다.
▲ 엔비디아가 블랙웰 아키텍처로 만든 B200칩과 GB200 AI가속기의 모습. 2024년 하반기에 출시 예정인 최신 제품입니다. |
ⓒ 엔비디아 |
설명을 들으니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나요? 그럼, 이제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을 다시 보겠습니다.
<디인포메이션은 "B(블랙웰)200 칩이 두개 탑재돼 있는 수퍼칩 'GB200′에서 B200 두개를 연결하는 실리콘 조각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고 전했다.>
▲ IT 매체 <디인포매이션>에서 엔비디아의 새로운 AI칩에 결함이 발견되어 출시가 늦어질 거라고 보도했습니다. |
ⓒ 디인포메이션 보도화면 |
"두 개의 블랙웰 GPU를 연결하는 프로세서 다이(칩 회로가 새겨져 있는 실리콘 조각)에 문제가 생겼다."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디인포메이션>의 기사에 따르면 블랙웰 GPU를 연결할 때 쓰이는 프로세서 다이에서 문제가 발견됐다는 거고, 전문적인 용어인 "프로세서 다이"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칩 회로가 새겨져 있는 실리콘 조각"이라고 설명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기사를 번역하면서 반도체 칩인 '프로세서 다이'를 단순한 '실리콘 조각'으로 대체해 버린 겁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된 정보, 깊이 있는 정보를 취사선택 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대통령님이 왜곡된 정보를 여과 없이 그대로 믿고 뭔가를 결정한다면 큰일이니까요. 반도체 칩 만드는데 유리기판이 대세란 소리에 유리 수급을 챙기라고 지시하는 일이 생길까 걱정되는 겁니다. 더욱이 이런 내용이 대통령님이 즐겨볼 것으로 예상되는 두 매체의 보도라 더 걱정되고요. 대통령님이 반도체에 진심이라면 이런 보도를 멀리하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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