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균기자가 만난 사람]윤이나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감명 깊게 읽은 이유
아픈만큼 성숙해진 것일까, 우승자 인터뷰 내내 정신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했다는 걸 느꼈다. 적어도 2년 전 그 일이 있기 전과 비교하자면 그랬다. 올 시즌 15경기 출전 만에 기다렸던 첫 승을 거둔 윤이나(21·하이트진로) 얘기다.
윤이나가 지난 4일 제주도 제주시 블랙스톤 제주에서 막을 내린 KLPGA투어 하반기 개막전 제주삼다수 마스터스에서 우승했다. 이번처럼 우승을 해도, 아쉽게 우승을 놓쳐도 그에게 그 일은 주홍글씨처럼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기에 어쩌면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날까지 그가 감내해야 할 업보일지도 모른다.
많지 않은 나이지만 윤이나의 삶은 싫든 좋든 간에 2022년 DB그룹 한국여자오픈 때 있었던 오구플레이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윤이나는 또래 여느 선수들과 다를 바 없이 말과 행동은 유쾌, 샷은 통쾌, 그리고 표정은 상쾌한 선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는 그런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습관적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식 키우는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며 “계속해서 경기하면서 골프 선수로 살아가다 보면 차차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스스로에게 씌운 굴레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윤이나는 골프 선수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3년간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가 1년6개월로 줄어들면서 올 시즌 투어에 복귀했다. 그의 복귀 일성은 “평생 속죄하면서 살겠다”였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는 우승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선물같은 우승이 찾아와 너무 얼떨떨 하지만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모르긴 몰라도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그의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친김에 그는 그간의 심경을 좀 더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윤이나는 “누군가는 짧다고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는데 나에게는 굉장히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 시간이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았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고민도 많이 했다”라며 “엇나가지 않도록 길라잡이를 자처해준 많은 분의 사랑과 응원 덕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정말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와의 대화를 진행하면서 사용하는 어휘 하나하나가 2년 전과는 달리 상당히 ‘고급지다’는 걸 느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처음 3개월가량 집 밖을 나가지 않고 많은 책을 읽으면서 말과 행동이 더 진중해졌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백세희씨가 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읽고 나서 많은 걸 내려놓게 됐다고 했다.
이 책은 작가가 10년 넘게 일종의 우울증 증세인 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를 치료하면서 치료 후기를 적은 에세이다. 죽을 듯이 허전한 마음 때문에 힘들고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울고 싶을 때는 참지 말고 울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일종의 치유서다. 윤이나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약해진 스스로를 다잡아 나갔던 것 같다.
그 기간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나눈 대화도 큰 힘이 됐다. 윤이나는 “제가 잘못을 하고 거의 3개월가량 집밖에 안 나갔다. 나가기가 무섭고 힘들었다”면서 “그래서 부모님과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다. 그때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윤이나는 이번 우승이 있기 전까지 세 차례 준우승이 있었다. 그를 응원하는 팬들 입장에서는 우승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때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선수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투어에 복귀하면서 우승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복귀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었기에 그걸로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컸다”라며 “매 순간 감사하면서 경기에 임하고 있다. 향후 목표는 성적보다는 건강하게 즐기면서 골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훌륭한 선수가 된다면 골프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진심이다”는 뜻을 밝혔다.
정신적으로 여물어지면서 기량도 일취월장했다. 그것은 올 시즌 성적으로 충분히 가늠된다. 그는 이번 우승까지 8차례나 ‘톱10’에 입상했다. 그러면서 시즌 대상 포인트와 상금 순위 2위로 올라섰다.
윤이나는 “샷이 루키 시즌보다 좋아졌다. 페어웨이 적중률도 좋아졌고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도 안정적인 샷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걸 최근 경기에서 실감하고 있다”라며 “샷적인 부분이 루키 시즌과 달라진 건 확실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우승을 물세례로 축하해준 동료들에 대한 감사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윤이나는 “처음보다는 좀 더 반갑게 인사를 받아준다. ‘수고했다, 잘했다’고 격려도 해준다”라며 “앞으로도 계속 선수들한테 조금 더 밝게 인사하고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동료들의 축하 의미를 담은 물세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는 올 시즌 꼭 이루고 싶은 바람이 하나 있다. 자신을 묵묵히 지원해준 스폰서에 대한 보은이다. 윤이나는 “하반기에 메인 후원사 대회인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이 있다. 프로 전향 후에 처음 출전하는 메인 후원사 대회”라며 “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저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에 보답해 드리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지난 4일, 10cm가량의 챔피언 퍼트를 할 때 윤이나의 표정에 주목했다. 만감이 교차한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라며 “다시 골프를 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 막상 우승을 결정짓는 퍼트를 남기게 되니까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이번 우승으로 윤이나가 그간의 마음고생을 다소나마 덜어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아울러 그 여세를 몰아 자신이 약속한 대로 골프 발전에 기여하는 선수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길 응원한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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