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기레기와 마스고미

강창욱 2024. 8. 9.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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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본 드라마에서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가려는 주인공들에게 그들을 돕는 남자가 달려와 "몇몇 매스컴(언론)이 왔으니 뒷문으로 가라"고 당부한다.

애초 기레기가 마스고미를 참고해 만든 신조어인지, 양국 대중이 언론을 바라보는 시선과 언어 사용 방식이 유사해서 어쩌다 사실상 같은 말을 쓰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기레기나 마스고미라는 멸칭은 그 연장선상에서 생겨났지만 이 용어의 대중화 전후는 기자들에게 매우 다른 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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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욱 온라인뉴스부 차장


어느 일본 드라마에서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가려는 주인공들에게 그들을 돕는 남자가 달려와 “몇몇 매스컴(언론)이 왔으니 뒷문으로 가라”고 당부한다. 그는 “(그중에) 특히 시끄러운 기자가 있다”며 ‘마스고미’라고 조용히 덧붙였다. 이 말은 한글 자막으로 ‘기레기예요’라고 옮겨졌다. 의역이 과했거나 센스가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직역이나 다름없었다. 마스고미(マスゴミ)는 언론을 뜻하는 매스컴의 일본식 표기 ‘마스코미(マスコミ)’에서 마지막 두 음절 ‘코미’를 발음이 흡사한 ‘고미(ゴミ·ごみ)’라는 단어로 슬쩍 바꾼 조어다. 고미는 쓰레기를 의미한다.

기레기가 ‘기자’와 ‘쓰레기’를 엮은 말이니 마스고미와 일대일 대응이 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애초 기레기가 마스고미를 참고해 만든 신조어인지, 양국 대중이 언론을 바라보는 시선과 언어 사용 방식이 유사해서 어쩌다 사실상 같은 말을 쓰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대중화 과정을 보면 둘 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넷슬랭’(인터넷 속어)에 해당하는데 문헌상으로는 일본의 마스고미가 수십년 앞서 등장한 것으로 돼 있다.

마스고미는 1950~60년대 일본에서 출판물이나 영화에 드물게 거론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70~90년대 활동한 도고 겐이라는 정치인이다. 성인 영상물(AV) 감독이기도 했던 그는 주류 ‘자민당’을 비꼰 듯한 ‘잡민당’을 80년대 초 창당했다. ‘잡스럽다’ ‘잡다하다’ 할 때 쓰는 그 ‘섞일 잡(雜)’자를 이름에 붙인 정당이다. 이들은 음란물 표현의 자유와 성소수자 옹호, 반자본주의, 사형제와 천황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기성 정치나 사회통념과 좌충우돌했다. 이렇게 거침없던 도고가 종종 언론을 비판하며 동원한 말이 마스고미다.

92년 7월 참의원 선거에 출마한 도고는 정견방송에서 “소련 붕괴(91년 12월)를 두고 ‘마스코미’가 아닌 ‘마스고미’가 자본주의의 승리, 사회주의의 패배라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NHK로 방송된 연설을 들으면서 시청자가 도고를 지지하게 된 것 같지는 않지만 한 단어로 절묘하게 압축한 언론 비판에는 적잖게 공감했을지 모른다. 잡민당은 몇 년 뒤 해산했지만 도고가 각인시킨 ‘마스고미’는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언론은 100여년 전부터 불신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미국에서 선정적 보도에 ‘옐로저널리즘’ 딱지를 붙인 것이 1890년대다. 기레기나 마스고미라는 멸칭은 그 연장선상에서 생겨났지만 이 용어의 대중화 전후는 기자들에게 매우 다른 환경이다. 고민이 더 많아졌달까. 이 고민은 자주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니혼게이자이 계열 매체 기자는 2008년 9월 칼럼에서 “수년간 필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스고미’로 불려왔다”며 “어떻게 하면 그들이 나를 마스고미라 부르지 않게 할 수 있을까를 최근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언론이 욕먹는 이유를 점검했다. 같은 언론이나 특정 권력에는 관대하면서 그렇지 않은 상대는 철저히 비난하는 이중잣대, 공정 보도에 장애가 되는 광고 수입 의존의 비즈니스 모델, 사실과 어긋나는 자기만족적 보도, 사과하지 않는 태도 등. 이 중 억울한 부분과 인정되는 부분을 설명했다.

기레기와 마스고미는 양국 기자들에게 검열이나 성찰을 강제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쓰레기로 불리지 않을지 20년 가까이 고민해온 일본 언론이지만 반감과 불신은 여전하다. 이걸 보면 한국에서도 기레기 소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지만 자정 촉진이라는 순기능을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창욱 온라인뉴스부 차장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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