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가족도 타인이다

2024. 8. 9.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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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란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

너무 잘 알아 모른다는 사실
인정 못해 … 공존하기 위한
협상·양보·타협이 필요하다

부모를 타인으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요즘 같은 휴가철을 맞아 따로 살던 부모와 자식이 가족여행이라는 명목으로 함께 지낼 기회라도 생기면 가족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십상이다.

가족은 서로의 기질과 습관을 잘 알지만, 그만큼 오해도 쉽게 생긴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대 차이, 가치관의 차이, 서로에 대한 기대의 차이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든다. 친밀감이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기대가 높은 만큼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더 큰 실망과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유난히 더운 올여름, 나도 팔순 노모와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어느 정도 스트레스는 예상했고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도 갖추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대화 속에 에너지가 고갈되고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모처럼 함께하는 여행이니 재미있게 다녀옵시다.”

“한 달만 있으면 추석인데, 뭐 하러 더운데 굳이 가자고 하노.”

“몸이 좀 불편해도 잘 걸을 수 있으니 건강하신 편이에요.”

“그래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팔순이 넘은 노모의 생각은 평생 그러했듯이 여전히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집중돼 있다. 그동안 애써 지켜온 건강과 돈을 재미나고 의미 있게 써야 할 미래가 바로 지금이라고 설득해도 노모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1940년에 태어난 모친은 20세기를 살아오면서 현재의 욕구 충족을 미루고 미래를 대비하는 태도를 유난히 강조하는 시대를 헤쳐 왔다. 언제 닥칠지 모를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 닥쳐올 위기에 대처하려는 책임감과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탓에 지금의 기회와 성취를 과소평가하는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 현재의 즐거움에 몰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에 21세기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시대다. 현재를 즐기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주류를 이룬다. 모친 세대와 비교하면 일어날 수 있는 불행에 대비하거나 미래를 책임지려는 자세는 부족해보인다. 그런 태도는 미래를 낙관하는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감이 너무 일상화되다보니 당장의 작은 행복에 매달리는 몸짓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래의 불안을 강조하는 세계관과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는 세계관은 세대 차이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게 되고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타인과의 갈등을 관리하거나 해소하는 것이 어려울 때, 우리가 보이는 태도는 피하거나 참거나 맞서는 것이다. 가족이 자신과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장 흔한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지난번 여행의 스트레스를 잊을 만하면 다시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참으면서 스트레스를 쌓거나 참지 못해 맞서고 언성을 높인다.

결국 가족에 대해서도 타인과 공존하는 데 필요한 협상이나 양보, 타협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 타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관계 맺기에도 더 유리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모친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해외여행은 가기 어렵더라도 집에만 있지 말고 자주 바람 쐽시다.” 모친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다. 무반응. 싫다는 뜻일까.

참! 모친은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왼쪽 귀에 대고 말해야 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하지 않는가. 모친 같은 노인에 대해서는 세계관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과는 별도로 신체 상태와 변화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옆자리의 모친 역시 성의껏 살피고 경청해야 하는 타인이다. 함부로 타인이라는 다른 세계를 이해했다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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