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상식을 죽이는 법 만능주의

2024. 8. 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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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상식, 염치, 양심, 예의를 규정하지 않는다.

잘못된 상식과 비뚤어진 염치가 법보다 우위에 있던 시절이 지나갔나 싶더니, 이제 우리 사회는 법 만능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법은 중요한 사안과 원칙을 규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현실적 공간은 상식과 염치가 채운다.

그러나 법 만능주의가 만연하면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일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게 되고, 상식과 염치는 설 자리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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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철 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법은 상식, 염치, 양심, 예의를 규정하지 않는다. 잘못된 상식과 비뚤어진 염치가 법보다 우위에 있던 시절이 지나갔나 싶더니, 이제 우리 사회는 법 만능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모두가 동의할 상식과 염치의 기준은 희박해지고 모든 사안을 법의 자구 다툼으로 해결하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 법에는 부끄러움의 규정이 없으니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 자들이 지도자의 자리에 서 “법대로 하자”고 한다. 이는 강자의 폭력적 언사일 뿐이다.

법은 인간사의 모든 상황과 다양한 경우의 수를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 법은 중요한 사안과 원칙을 규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현실적 공간은 상식과 염치가 채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상식선에서 합의할 수 있는 일을 법원에서 해결하지 않는다. 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불법이 판명되기 전에도 머리를 숙여야 할 때를 안다.

그러나 법 만능주의가 만연하면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일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게 되고, 상식과 염치는 설 자리를 잃는다. 지난 몇 주 동안 그야말로 희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법적 요건을 갖춘 후 권력의 자리로 이동한 것이 좋은 예다. “1948년 이전에는 한국 국민은 없고 일본 국민만 있었다”는 말로 일제 식민지배 시기를 표현한 인사를 하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한 것은 법적 하자가 없지만 상식에 벗어난다. 부적절한 공금 사용에 대한 세간의 의심을 받는데도 이런저런 법적 핑계를 대며 청문회 자료는 제출하지 않고 결백만 주장한 공직 후보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에 대한 야당의 비판도 여전히 불법과 합법의 틀에 갇혀 있다. 야당 출신 국회 상임위원장은 국회법 소책자를 휘두르며 ‘합법적으로’ 막말을 하고 대통령과 여당에는 불법을 저지른다며 ‘법적 수단’을 운운한다. 그러나 합법을 방패로 삼는 이런 식의 기싸움은 민망하고 비효율적이다. 서로 불법을 저지르는 자를 상대하지 않겠다며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는 일은 다 합법이니까 거친 말과 행동도 정당화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사라지고 법 기술자의 농간만 남는 것은 당연지사다.

법 만능주의와 그 부작용은 사회 전반과 기독 교회 안에도 퍼져 있다. 가족 간 법적 분쟁은 해마다 늘고 이웃 간의 사소한 다툼도 재판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반면 자기 아들을 ‘독생자’라 부르고 신성모독 발언을 하는 목사나, 불륜 의혹에도 자리를 지키는 교단 총회장도 범법의 요건과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 그대로 용인한다. 그 와중에 교회는 기독교인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여러 법안에 대해서는 밖으로는 목소리를 높이고, 안에서는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함께 숙고하기보다 교회법의 이름으로 억누른다.

예수님은 율법만 까다롭게 지키면서 정작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유대 지도자들의 법 만능주의를 꾸짖으셨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정의, 긍휼, 믿음과 분리된 것은 오늘날 법을 앞세우다 상식과 염치를 상실한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법은 공동체의 상식과 염치를 전제로 할 때 적절하게 작동하고,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면 공동체가 망가진다.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교회 안이나 밖이나 법을 둘러싼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공동체 안의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선거나 탄핵 같은 또 다른 법적 수단을 통한 견제는 최소한의 통제지만 한계가 있다. 자신과 남을 모두 법과 규칙의 틀 안에 가두는 것보다 다른 의견과 틀린 생각을 정교하게 구분해 서로를 합리적인 논변으로 설득하려는 소통의 노력이 훨씬 더 민주적이다. 나아가 합법으로 포장한 몰상식, 몰염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과감하게 배척하는 시민과 성도의 용기와 지혜가 절실하다.

손화철 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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