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판앤펀] 총·칼·활에 AI를

2024. 8. 9.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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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앙가르드(en garde)-쁘레(prets)-알레 (allez)! 은빛 수트와 마스크를 쓴 선수들이 움직인다. 긴 칼을 들고 서로 노려보며 맞서는 장면은 격투기 중 가장 아름다운 정지화면을 만들어 낸다. 다리를 쭉 뻗으며 번개 같은 속도로 휘두르는 칼날들. 그리고 공격 성공을 예감한 선수의 환호. 펜싱은 올림픽 종목 중에서도 손꼽히는 근사한 스포츠다. 로마 시대 검투사에서 비롯했을 몸동작에 우주복 같은 경기복이 엇갈리며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품은 듯한 모습이다. 2000년 시드니에서 대표팀이 첫 메달을 딸 때만 해도 낯설었던 펜싱은 이번엔 남자 사브르 단체 3연패를 했고, 2관왕 오상욱을 스타로 탄생시켰다. 종주국 프랑스 등 유럽을 압도하는 실력과 체격을 뽐내며 펜싱 강국이 된 모습에 보는 사람들도 신이 났다.

「 눈으로는 판단 힘든 펜싱 승부
기술 이용 판정은 불가능한가
공정해야 진짜 인간다운 경기

그런데 문제가 있다. 솔직히, 아무리 봐도 누가 점수를 얻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휘리릭 선수들의 칼이 불꽃처럼 달려들고 전기 센서는 양쪽 다 켜진다. 두 선수 다 환호한다. 누가 이긴 걸까. 1초가 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진 승부를 직관적으로 절대 판단할 수 없다. 에페 경기는 100분의 1초라도 먼저 센서를 밝히면 이기지만, 플뢰레와 사브르는 공격우선권이라는 걸 따져야 한단다. 이건 순전히 심판만이 결정한다. 비디오 판독을 위해 심판이 경기장을 벗어나고 다시 돌아와 판정을 내릴 때까진 아무도 승부를 확신하지 못한다.

스포츠가 관객에게 주는 가장 큰 쾌감은 한점을 얻을 때,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선수와 함께 내지르는 환호에 있다. 화살이 10점 과녁에 명중했을 때, 1000분의 1초라도 빨리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 공이 라인 안쪽 혹은 바깥쪽에 떨어졌을 때, 골대 안으로 골을 넣는 바로 그 순간. 그런데 펜싱은 너무나 자주 관객의 쾌감을 지연시킨다. 그리고 심판만 바라보게 만든다. 심판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면 판정과 관련된 문제는 생기게 마련이다. 펜싱에는 오심 논란이 많다. 2012년 런던에서는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경기중 하나로 기억되는 펜싱 신아람 선수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1초’ 사건이 벌어졌다. 계기원의 잘못이라고 하지만 결국 심판의 오심이었다. 오상욱도 도쿄 올림픽에서 심판의 실수로 억울하게 패배했다. 이번 올림픽에선 유난히 프랑스 팀의 항의가 많았다.

인공지능(AI)의 시대에 걸맞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이번에 ‘AI 올림픽’을 내세웠다. 체조 경기에서 AI를 활용해 3D로 선수들의 움직임을 재현해 심판에게 참고자료로 활용하게 하고, 초당 1만 장의 사진을 찍던 육상결승선은 4만 장을 찍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양궁선수들의 대활약에도 ‘양궁 슈팅 로봇’(사진)과의 훈련이 역할을 했다는 보도도 많았다. 이런 최첨단 AI는 펜싱 판정과 중계에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선수들의 움직임을 분석해서 ‘공격 우선권’을 화면에 표시해주고 먼저 터치를 한쪽만 불을 켜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경기장 대형모니터와 중계화면에 표시된다면. 명백하게 선수도 심판도 관객도 함께 보면서 승부가 납득할만하게 가려지지 않는다면 오심의 가능성에서 벗어나긴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스포츠가 첨단기술을 판정에 도입한 역사를 보면 기술의 완성도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지금은 당연하게 보이는 축구의 비디오판독(VAR)이 월드컵에 정식 도입된 것은 무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이다. 그 전엔 TV의 슬로비디오를 통해서 누가 핸드볼 했는지 오프사이드인지 뻔히 보면서도 심판의 판정 혹은 오심을 받아들여야 했다. 호크아이로 축구 골라인과 배구나 배드민턴의 선 안팎을 판정한 것은 2014년 리우 올림픽부터였다. 펜싱이 비디오 판독을 도입한 것도 2008년. 심지어 사브르 경기는 1988년까지는 전기 센서도 도입하지 않았다. 신아람 선수 사건 때 말도 안 되는 1초 논란이 벌어졌던 것은 수동으로 시간을 계측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측 시계의 최소 단위가 1초였기 때문이었다. 0.2초 정도만 더 줘야 했으나 시계가 1초밖에 표시를 못 해 1초를 더 주었고 그사이에 승리를 뺏겼다. 100분의 1초 단위로 공격이 벌어지는 펜싱경기에서 100분의 1초를 표시하는 시계를 쓰지 않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무려 2012년에.

결국 기술이 아니라 의지가 부족한 게 문제다. 피파는 2010년대 중반 정식 도입 이전 약 10년 넘게 비디오 판정을 거부해왔다. “심판의 권위가 손상된다” “‘휴먼 게임’인 축구의 본질을 해친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라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러나 기계의 도움으로 오프사이드가 몇㎝ 차이로 결정된다고 해서, 자동 투구판정 시스템 도입으로 로봇이 스트라이크를 판정한다고 휴머니즘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휴머니즘은 인간이 만든 기술로 좀 더 공정한 경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누가 봐도 명확한 승부, 그리고 그 순간에 마음껏 환호하고 싶은 관객들을 위해 펜싱도 얼른 기술을 더 활용할 것을 촉구하고 싶다.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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