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 서린동의 조선시대 이름은?
현재 우리가 발을 딛고 살며,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범위는 서울이 중심이 될 것이며 또 서울의 해당 지명에 조응하는 전국의 지명들을 함께 비교 검토할 것이다. 단순히 지명 유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 등을 함께 이야기 하며 그 곳에서 벌어진 우리의 역사를 상상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서촌을 걷는다> 등 서울의 도시 탐방에 관한 책을 쓴 바 있다. <기자말>
[유영호 기자]
조선의 작명 방식과 철학
▲ 조선초기 한성부 행정구역 5부 52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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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선전도에 기록된 한성부 52방의 명칭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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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도성에 새겨진 조선의 유교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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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국적 지명 정리
이러한 기준으로 작명된 조선의 지명은 조선역사 500년간 약간의 변동만 있었을 뿐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 후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당장 도성과 그로부터 약 10리까지를 범위로 해온 한성부가 해체되어 경성부로 그 명칭이 바뀌고 그 범위도 좁아졌다. 뿐만 아니라 이제 경성부는 독립적인 행정구역이 아닌 경기도 산하의 일개 행정구역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개별 행정구역 명칭에 대한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 명칭이 가장 크게 바뀐 시기는 전국적으로 부군면(府郡面) 통합이 이루어진 1914년이며, 이 때 이루어진 행정구역 명칭이 지금의 법정동이란 이름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 시기는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가 된 지 9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본식 지명으로 바뀐 곳은 대도시이며, 그 중에서도 주로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국한되었다.
예컨대 서울의 경우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의 중구 일대가 ~동(洞)이나 ~리(里) 등의 우리식이 아닌 ~정(町)이라는 일본식 지명방식을 사용했을 뿐 청계천 이북의 종로구나 그 밖의 지역은 그동안 쓰여 온 조선의 지명 방식에 따랐다.
또한 ~정(町) 앞에 붙는 지명 역시 상징적인 몇몇 곳들에 대하여 조선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본정(本町), 명치정(明治町), 죽첨정(竹添町) 등의 일본식 지명을 사용했고, 대부분은 기존 조선의 지명의 끝에 동(洞)이나 리(里) 대신 정(町)을 붙여 사용했다. 물론 1936년에 이르러서는 조선인들이 주로 있는 지역까지 일본식 지명을 적용하지만 그때 조차도 도시에 국한되었다.
그후 해방이 되고 그 이듬해인 1946년 일본식 지명을 모두 우리식으로 변경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단지 정(町)을 동(洞)이나 리(里)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명들은 새로운 명칭을 적용하여 고쳤다. 이렇게 해방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지명이 서울의 충무로, 을지로, 충정로와 부산의 광복로, 충무동 그리고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 등이며, 인천에서는 송학동과 신흥동, 숭의동 등이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하지만 당시 제대로 고쳐지지 못하고 여전히 일본 군국주의의 냄새가 남아 있는 지명들도 꽤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뒤에 따로 서술하기로 한다.
▲ 600년 넘게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울의 동명 |
ⓒ 유영호 |
이러한 관아는 국가행정을 취급하는 곳으로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로 <주역>에 나오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을 베풀면 반드시 경사가 따른다)'에서 따온 말이다. 참고로 적선방(積善坊)에 대응한 여경방(餘慶坊)은 덕수궁의 옆에 해당하는 지명이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 이름은 사라지고 중구 정동(貞洞)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지금은 북촌 한옥마을로 널리 알려진 종로구 가회동(嘉會洞)도 600년 넘게 자신의 이름을 지켜내고 있는 곳이다. 한자의 의미는 '기쁘고 즐거운 모임'이란 뜻으로 '어진 신하가 어진 임금을 만나 국운이 창성하는 좋은 만남'을 뜻한다.
그리고 '나라를 편안하고 안전하게 한다'는 뜻의 안국방(安國坊)이 지금의 안국동으로 남아 있고, 또 조선시대 시전이 배치되어 상권을 형성했던 종로1가의 남쪽 서린방(瑞麟坊)이 지금의 서린동으로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의 북쪽에 위치한 '통의동(通義洞)' 일대는 조선초기 의통방(義通坊)이라 하였으나 갑오개혁 때 통의방(通義坊)으로 고친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앞선 이름과 같고, 개명 주체 역시 조선이기에 여전히 600년 이상 자기 이름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 외 52방의 합성 지명들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정비 속에서 조선의 기존 지명들은 잔존과 소멸, 두 가지 운명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지명이 하나로 통합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대학로 인근의 종로구 숭인동(崇仁洞)은 한성부 52방 가운데 그 인근에 위치한 숭신방과 인창방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며, 서울대학교병원이 위치한 연건동 역시 연화방과 건덕방에서, 또 동대문 옆 창신동과 숭인동은 인창방과 숭인방에서 각각 서로 다른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이렇게 작명 된 지명은 이 외에도 여럿 있으며, 그 밖에 자연부락 명칭에서 따온 것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처럼 두개의 지명을 합쳐서 새로운 지명을 만드는 방식은 행정구역의 확대와 정비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재에 와서는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인구가 늘며 새로운 행정구역이 탄생할 때 기존 법정동의 명칭은 그대로 둔 채 각 법정동의 명칭을 한 자씩 따서 새로운 법정동을 만드는 방식이다. 결국 새로운 법정동이 생겨도 기존 법정동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예컨대 신촌 세브란스병원의 영안실부터 금화터널까지 도로 양쪽에 위치한 서대문구 대신동(大新洞)은 1962년 새롭게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 대현동과 신촌동의 일부를 잘라 만들며 이름도 그 두 곳의 이름에서 각각 한 자씩 따온 것이다.
또 1995년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리 독립할 때 금천구 가산동의 경우는 가리봉동과 독산동의 일부를 취해 곳으로 지명 역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하지만 지하철역의 명칭은 조금 다르다. 교통수단이란 그것을 통해 이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 행정단위의 이해관계로 전혀 새로운 역명이 탄생되어 이용객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1985년 성북구 석관동 지역이 인구대비 지하철역이 없어 주민들의 청원에 의해 그 곳에 수도권전철 1호선의 새로운 역이 신설될 때 그 명칭을 '석관역'으로 하려고 하였지만 그 역이 월계동에도 걸쳐 있어 월계역으로 해달라는 청원과 대립되며 결국 그 역이 서울의 어디쯤 위치하는지 누구도 모를 '석계역'이 되고 말았다. 이용객들은 석계역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학습을 해야만 했다.
이처럼 양자의 이해관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양자의 눈치만 보는 원칙없는 행정집행은 1996년 지하철 3호선의 대곡역 신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곡역이란 명칭 역시 고양시 대장동과 내곡동에서 따온 이름이다. 결국 '내가 못 먹을 바에는 남도 못 먹게 침 뱉는 꼴'이 되고 만 셈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최근의 실례로 그 동안 일제강점기부터 오랜 세월 경춘선의 한 역이었지만 간이역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평내역이 그 일대 인구가 늘며 2006년 평내호평역으로 역명을 변경한 것에 대하여 무척 희망적이란 생각이 든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이름처럼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이미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서촌을 걷는다> 등 서울의 도시탐방에 관한 책을 출간한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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