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공산당' 때문에... 부부관계 파탄 날 뻔했습니다

이재현 2024. 8. 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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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노동] 영화 <찬란한 내일로>

[이재현]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의 선거 결과 발표 때마다 한국의 사회운동도 들썩이곤 한다. 반가운 소식에 때론 흥분하지만, 유럽의 노동정치가 마주한 난관이 한국만큼이나 녹록지 않음에 한숨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오랜 역사적 맥락 속에 오늘의 현실을 비추어 보면 더욱 그렇다.

올봄 국내에 개봉한 난니 모레티의 <찬란한 내일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노동정치가 잃어버린 가능성을 되짚어 본다. 68세대의 급진적 활동에 참여했던 난니 모레티는 이탈리아 정치지형을 양분해 온 거대정당이자 노동자들의 생활세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던 공산당이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동구권의 붕괴 속에 마주했던 위기를 과거 이미 여러 차례 영화로 다룬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자주 그래왔듯 영화를 촬영하는 감독 스스로를 연기하며, 1956년 당시 갈림길에 섰던 공산당의 모습을 되돌아 보려 한다.
 영화 스틸컷
ⓒ 에무필름즈
정치의 죽음 선언 보다, 새로운 만남 통한 낙관

영화의 제목인 이탈리아 파르티잔 노래의 가사인 '찬란한 내일로'가 함의하듯, 냉전의 격화 속에서도 반파시즘 투쟁의 기억을 간직한 이탈리아 공산당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은 밝아 보였다. 지역사회에서 '민중의 집' 역할을 하는 당 조직과 일상에서 배포되는 기관지, 공산당 지방정부의 노력을 통해 낙후한 마을의 밤을 밝히는 전기는 20세기 중반 노동자계급이 상상한 미래와 그 미래를 향하는 발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소련의 간섭에 반발한 헝가리 혁명과 이에 대한 소련의 무력 침공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 큰 위기를 초래하고, 부다페스트에서 마을로 공연을 온 헝가리 서커스단과 연대해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작은 마을의 당원들도 반으로 갈라지고 만다.
1956년의 이야기를 필름에 담으려는 감독의 사정도 어렵긴 매한가지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젊은 배우는 이탈리아에 공산당이 있었냐고, 이탈리아에 러시아인들이 그렇게 많았냐고 웃지 못할 질문을 던진다. 작업과 생활에서 고집불통인 감독의 모습은 가족들과 갈등을 빚고, 넷플릭스에서 투자를 받으려는 시도는 빠른 속도감을 요구하는 OTT 미디어 산업의 요구에 좌절한다. 부인이 함께 작업하는 젊은 감독은 과잉된 폭력으로 자극을 생산하는 작업이 반파시즘 '네오리얼리즘' 영화감독들의 전통을 잇는다고 주장하고, 분노한 주인공이 밤새 퍼부은 장광설은 부부관계를 파탄으로 치닫게 한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망도, 영화예술의 추구도, 심지어 오랫동안 이어온 사랑도 위기에 처한 절박함.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을 헝가리인들에 대한 공감과 당 규율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다 자살하는 결말로 몰아가려 한다. 마치 공산주의와 정치의 죽음, 예술로서 영화의 죽음, 그리고 사랑의 죽음을 함의하는 것처럼.

그러나 난니 모레티는 그렇게 자기파괴를 통해 체념하거나 상상 속에 사라진 과거를 붙잡고 푸념하는 결말로 나아가기를 끝내 거부한다. 영화에 대한 자신의 고집스러운 소신을 비추는 카메라는 시종일관 코믹하지만, 원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새롭고 우연한 만남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시나리오에 없었던 감정을 배우들의 연기 속에 끌어안으면서, 우발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도취해 모두 함께 춤을 추면서, 그리고 놀랍게도 소주로 '건배'를 외치는 한국인 제작자들과 불신을 넘어 만나게 되면서 말이다.

주인공의 비극적 죽음을 결말로 삼는 대신, 역사에서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을 발굴하고 현재화하며 대안적 서사를 구성하는 일은 그런 만남을 통해 가능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원들이 헝가리의 서커스 단원들과, 늙은 감독이 젊은 영화인들과, 낡은 사랑이 새로운 사랑과 시공간을 넘어 함께 행진하는 결말은 역사의 좌절과 굴절 속에서 틈새의 가능성을 열어낸다.
 영화 스틸컷
ⓒ 에무
함께 행진하며 외칠 새 언어

우리는 노동자 운동과 노동정치의 역사를 돌아보며 그 찬란한 성취에 경탄하기도 하고, 오늘날의 실패를 야기하게 될 결정적 오류들을 보며 심란해지기도 한다. 사회적 조건의 변화를 들어 역사적 유산을 내팽개치고자 하는 충동, 혹은 정반대로 과거의 유산을 낭만화하고 이에 집착하려는 충동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 수많은 유행이 빠르게 낡은 것이 되어 넝마가 되어가는 근대세계에서, 그런 넝마를 줍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난니 모레티의 영화–꿈과 일기'를 쓴 이바 마지에르스카와 라우라 라스카롤리는 생활세계의 변화로 새로운 정치적 열망이 태동하는 시기에 전통적인 좌파 정당의 관료적 정치는 대중의 자발적인 항의를 반영할 담론을 생산하는 데 실패했고, 난니 모레티의 정치적이고 예술적인 실천은 신우파의 패러다임에 맞서 새로운 정치적 언어를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고 이야기한다. 195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는 난니 모레티의 이번 시도는 과거의 넝마 속에서 성과와 한계를 모두 길어내 새로운 연대의 언어를 구성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긴밀함과 함께 그 안의 성차별과 퀴어 배제를, 대중운동의 활발함과 함께 조직 의사결정의 위계화를 포착하는 모레티의 1956년 역사 읽기는 과거의 유실된 가능성을 오늘날 다시 활성화한다. 그렇게 시작된 오늘의 행진은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비극 속에 사라져간 과거의 존재들을 오늘의 투쟁으로 구원하는 일이다.

'노동해방'도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구호도 이제 지나버린 유행처럼 취급되는 지금, 다양한 한계가 존재했던 과거의 운동을 되풀이할 전범으로 삼을 수만은 없는 지금, '역사를 반댓결로 빗질'(발터 벤야민, <역사 개념에 대하여>)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작업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으며, 오직 새로운 만남에 역사를 개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찬란한 내일로>가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역사를 다루며 그랬듯, 노동해방을 외쳐온 우리의 운동사를 이주민의 관점으로, 퀴어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어쩌면 유실된 역사 속 가능성 속에서 오늘날 함께 행진하며 외칠 언어를 길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찬란한 내일로> 이탈리아어 포스터
ⓒ 사케르필름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재현 님은 플랫폼c 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8월호에도 실립니다. 한노보연 후원 문의 : kilshlab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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